무의식이 전부다
어제 쓴 글에서 무의식 속의 이성이 감정을 통제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쓴 글에서는 100% 감정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한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면 모순된 것이 아닐까?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무의식에 들어있는 수많은 명제들이 나의 감정을 일으키고, 그 감정이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무의식에서 조종한 감정대로 선택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자꾸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3의 입장에서, 혹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상위인지, 메타인지를 사용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나의 무의식은 쉽게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알아차린다고 해도 바꾸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 보려면, 우선은 알아차려야 한다. 무의식의 작동하는 모습을 말이다. 나의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차리려면 내 감정을 정확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짓 없이. 포장 없이.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만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실은 기분이 나빴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는데, 그분은 찌푸린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데,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나와 업무가 엮인 분도 아닌데, 나에 대해서 뭘 아실 것 같지도 않은 분인데, 왜 그러시는 걸까? 나에게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실까? 연세가 많은 분이라 함부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기분이 나빴다. 평소대로라면 그분이 기분이 안 좋은 상태 셨겠지.라고 내 감정을 애써 긍정적으로 바꾸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내 노트에 기분이 나빴다고 적어 보았다. 애써 바꿔보려고 하지 않고 그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적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었을까?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기분 나쁜 감정 뒤에 나의 생각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준대로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다. 내가 친절을 베풀면 나도 친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지만, 어제 읽은 <돈의 신에게 사랑받는 3줄의 마법> 책에 따르면 준 대로 받아야 한다는 문장이 나를 얽매고 있었던 거다.
세상의 재화가 유한하고, 모든 과정을 이해 득실의 관계로 받아들이면, 내가 얻는 만큼 누구는 손해를 봐야 하고, 누가 얻는 만큼 나는 잃어야 하는 설정이 생긴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이 이득을 얻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고, 내 걸 나누어주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다르다. 세상의 재화가 무한하고, 돈도 무한하고, 이해 득실의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면, 내가 설정을 그렇게 해 놓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의 이득에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고, 내가 이득을 본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걸로 다른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건 아니니 괜히 기분 상할 필요도 없다.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것은 또 소비를 한다는 것은 그저 나에게 있던 재화나 돈이 다른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흐름이 부피가 커질수록 나는 풍요로운 소비를 할 수 있게 된다. 흘러간다는 말은 흘러가서 또 나에게로 흘러온다는 뜻이다. 자꾸 흘려보내야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해빙>의 저자처럼 풍요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강조했다. 100원을 쓰든 100만 원을 쓰든, 정말 원하는 것에 쓰고, 풍요의 감정을 느끼라는 것이다. 풍요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의 무의식에 반하는 일이다. 나의 무의식은 계속해서 절약을 강조하고 사치와 낭비의 기준을 내세우며 조금만 그 기준을 넘어가도 죄책감을 느끼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 100원을 써서 무언가를 구입했다면, 그 소비한 것에 대한 만족감보다 싸게 샀다는 절약의 기쁨이 더 큰 것이다. 그건 풍요가 아니다. 또 100만 원을 썼다면, 그 액수가 커서 분명 죄책감을 유발했을 것이다. 원하던 것을 구입해도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풍요의 감정을 느끼자.라고 생각만 해서는 풍요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왜? 감정은 무의식의 설정대로 움직이니까. 그래서 결국 풍요의 감정을 느끼라는 것은 무의식의 설정된 내용을 바꾸라는 뜻이다. 감정은 무의식의 주관하에 있으니까. 100원이든 100만 원이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샀을 때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도록 무의식을 다시 세팅하는 과정을 하면 또 다른 풍요를 이끄는 무의식 상태가 되어 100% 감정적 선택을 하더라도 풍요를 이끄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계속 풍요로워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다.
<돈의 그릇>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제목처럼 돈의 그릇을 넓혀야 돈이 들어오는 거다. 돈의 그릇이 작은데 큰돈을 바라는 건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일인 거다. 돈의 그릇을 넓히는 게 바로 무의식의 설정을 변경하는 일일 테고.
나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만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으로, 존경받는 엄마로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