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하다
야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데 남편이 전화가 와서 둘째 딸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짜증 내고 하는 것은 많이 나아졌는데, 무슨 일일까 하고 걱정을 안고 집에 들어갔더니 남편은 상황 설명을 하며 자기가 예민한 거냐고 묻는다.
정확하다. 예민하다. 내가 보기엔. 하지만 예민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민감한 단어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쓰며 대화를 마칠 무렵에 남편이 그런다.
"난 요즘 너무 무기력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 남편이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힘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렇게라도 자신의 상태를 나에게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요즘 어떤지, 괜찮은지 물어도 남편은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퉁명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시비를 걸거나 괜찮다고 말은 해놓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식이다. 남편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은 잘 알고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다른 느낌이 든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이해가 영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만에 솔직하고 담백한 표현을 들으니 반가웠다. 만약 남편이 분노를 동반해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이 분노하는 순간, 방어 스위치가 켜져서 나 지키기에 바쁘고 남편 이야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면 그 죽음 같은 공포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뿐이다.
남편의 그 한마디가 고마워서, 나름 공감을 해주었다.
"당신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00 이를 받아줄 수 있겠어. 당신 너무 힘들겠다. "
이성적인 사람들은 자동으로 공감하는 것이 어렵다. 공감의 정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해 주는 것이라고 볼 때, 나는 가슴으로 공감하기보다 머리로 공감을 애써서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많은 경우에. 하지만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정적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반응이 나온다. 이야기를 들은 즉시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의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한다.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생각하고 단어를 골라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며칠 전 고3학생이 복도를 지나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 이제 졸업이에요. 힝~" 그 아이가 고1일일 때 내가 가르쳤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를 알고는 있지만,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우선 깜짝 놀랐고,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또 놀랐다. 그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거였다.
"아직 멀었잖아. 졸업은 1월인데? 내년 1월." (이 시점은 10월이다.)
이게 무슨 코미디일까. 이런 동문서답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내 반응을 보고 같이 있던 아이들 중의 한 명이 "야, 선생님은 너 졸업하면 더 좋아하신다!"라고 말했고, 듣던 아이들은 모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반응했다. 너무 당황해서다.
한 번씩 맹하고 백치 같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신선한 새로운 경험은 또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국어 선생님이 맥락도 이해를 못 하다니. 바보 같았다. 아니, 바보 맞다.
내 깊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나를 향한 인식, '바보 똥자루'에서 겨우 벗어났나 싶었는데, 또다시 너무나 확실한 증거를 확인한 것 같아서 슬펐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바보 똥자루인가.
하지만, 바보 똥자루도 어떤 때는 똑똑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하다. 그러니 통합적으로 바라봐 줘야 한다. 항상 똑똑하거나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도. 최고보다는 최선을. 이란 말을 조금 바꾸어서 라임은 안 맞지만, 완벽보다는 최선을.이라고 표현해 보자.
아무튼 결론은 나는 둘째 딸과 따로 대화를 하며 아이의 힘든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공감을 해 주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나는 꽤 괜찮은 반응을 했다! 아이는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간식을 만들어주었다. 그 밤시간에! 그리고 오늘 아침 늦잠을 잤다. 그래도 너무 뿌듯하다.
아이는 힘을 내서 또 새롭게 맞이할 고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의 마음은 바뀌었고, 나는 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00아,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네 마음이 제일 소중하다. 네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진짜야. 그게 거짓말 같고 누가 보기에는 과장된 것 같아 보여도, 그래도 니 감정은 진짜야. 못 견딜 정도로 힘이 들면 언제든지 도망쳐도 돼. 학교고 공부도 세상도 다 필요 없어. 엄마는 00 이가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해. 도망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