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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Dec 04. 2023

했으면 했다고 말을 하자.

관계의 통장

 어제 오랜만에 집안 청소를 쪼메 하고, 오늘 아침까지 남편이 아무 말이 없길래, 슬쩍 한 마디 했다. 내가 어제 바닥을 닦았다고. 다른 이야기들 속에 묻혀서 별 반응은 없었지만. 말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뿌듯..


 칭찬해주고 좋아해주길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알기를 바랐다. 내가 뭔가 했다는 것을. 사람 관계에도 통장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할 수 있을 때 자꾸 저금을 해 놓아야 한다. 나 이것도 했고, 나 이것도 했다~ 이러면서. 말을 안 하면 모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몇 가지는 묵묵히 하는 것이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또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몇 가지는 일을 미루는 것이고,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집안 살림이 깔끔하지가 않다. 남편은 여자라면 당연히 아기자기하게 집을 꾸미고, 오손 도손 반짝 반짝 예쁜 가정집을 꿈꿨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여자는 아기자기함과는 거리가 멀고, 청소도 제대로 안 하기 일쑤고, 자기 옷도 아무데나 벗어 놓고 출근해 버리는 그런 여자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는다.


 남편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나는 예쁜 신혼집도, 예쁜 결혼식도 아기자기한 결혼 생활도, 아무것도 기대한 것이 없었다. 결혼식 손님이 찾아와준 것이 그냥 반갑고 고마웠고, 드디어 결혼을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고, 무사히 임신하고 무사히 아이가 태어나서 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직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또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에게 크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 관심도 없고. 남편이 지금보다 잘 나가기를 기대했었지만, 그게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내려놨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 내가 잘 되는 것에 대한 야망은 언제나 있었다. 임용고시에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키우며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 있을 때에도, 다시 출근해서 일하는 지금도 나 자신에 대한 욕심은 끊어질 줄 몰랐다. 


 약간 미쳤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에 대한 전능감이 있었고, 그 안에는 깊은 열등감도 있었다. 위대한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 위대한 일을 이루고 싶은 마음, 내가 위대해지고 싶은 마음...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꿈이 있었다. 


 내 사주를 보면, 인성이 세개나 있다. 인성과다라고 한다. 나를 도와주는 것이 오행이 여러 개이므로 많다는 뜻이다. 또 너무 많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부모님의 돌보심으로 편안하게 자랐다. 공부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그냥 공부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평생에 설겆이를 몇 번밖에 안 해 본 내가 결혼을 하고 밥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청소도 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빨래를 하는 이 모든 일은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당연히 잘 못했다. 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니까 하게 되었다. 남편 뒤치다꺼리는 하기가 싫었지만, 아이 뒤치다꺼리는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보다 더 훈련기간이 길어야 했는지, 네 아이를 기르면서 그렇게 천천히 살림하는 아줌마다운 면모를 조금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조금이라는 것이 부끄럽지만, 여전히 모자라다. 


  남편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나도 남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서 서로 이해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알 만큼 아니까, 통장에 저금을 자꾸 해서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아기자기한 집도 못 만들어주고, 애교도 없고, 늘 영혼 없는 리액션만 하는 재미없는 아내가 바로 나다. 적다 보니 더 미안해진다. 그만 적어야겠다. 


 아니다. 나도 남편을 웃겨줄 때가 아주 가끔은 있다. 그게 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드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고, 그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다. 나도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인가보다. 


 나도 즐겁고 행복하고, 남편도 즐겁고 행복하고. 어차피 인생은 고단하니까, 그건 바꿀 수 없지만,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봐야 한다. 그걸 하는 게 위대한 인생인 듯하다. 이제 나에겐.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내 삶을 채워가는 것.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웃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미소짓는 것.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나는 쪼매 행복해졌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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