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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Dec 06. 2023

관계도 수치화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해질까

 시험이란, 보이지 않는 나의 실력을 눈에 보이는 수치로 나타내 주는 신박한 도구다. 


 궁금하지 않은가? 나의 현재 실력이? 사회 72점. 수학 81점.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이 안개에 갇힌 내 진짜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준다. 물론 시험이라는 도구에도 오류는 있고, 오차도 있다. 나의 정확한 실력이 그 점수라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궁금한 걸 알려주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시험 점수는 나와 내 친구를 비교하게 해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00은 나보다 국어를 잘 하네, 나는 00보다 수학을 잘 하는구나. 나는 수학을 국어보다 더 좋아하니, 이공계열로 가는 게 좋겠다. 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도 준다. 


 추상적 개념의 구체화. 밝히 보고 싶고,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마음. 애매한 것은 싫다. 75점. 91점. 


 MBTI에서도 나의 T 성향은 85점이고, F 성향은 15점이다.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답답하다. 나는 과연 상식적인가?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것은 얼마나 일반적인 범주에 있나?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어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따돌림이었다. 남편은 개성이 강하고 성격도 다혈질이라 종종 사람들 관계에 있어서 부딪힘은 있어왔다. 그러나 마음도 여리고, 따뜻한 사람인데, 그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내가 남편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의 말이 100% 다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듣기만 할 때보다 확실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남편 얘기만 듣고서는 갈등의 시작이 누구의 잘못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분명 남편의 말이나 행동에도 실수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남편은 무조건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나를 보고 무척 서운해하고 화도 냈지만,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혹시나 남편의 피해의식이 계속해서 이런 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약한 사람에게 나의 이런 반응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안해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사실 관계를 알고 싶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문제를 알아야 문제를 풀지 않나. 그러다 남편이 하도 서운해 하니 무조건 남편 편으로 돌아서서 함께 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연기력이 필요해진다. 


 지금 나에게 닥쳐온 이 관계의 어려움도 실상이 뭔지 정확히 알고 싶은데, 아마 나는 결국 알지 못할 것 같다. 그 사람의 마음도, 우리 관계의 역학도. 나는 결코 분명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란 사람도 독특한 존재이니까 그렇다. 내가 가진 관점과 세계관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이 상황을 바라보면,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관점과 세계관으로 바라볼 테니, 우리는 실상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더 무엇을 바라겠나.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평행선을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그래서 내려놓자. 이건 연구한다고 밝혀질 일이 아니다. 남편 말고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직장에 오니, 또 있고, 또 있다.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닌데, 매번 놀란다. 


 그냥 내가 이만큼인 사람인 거다. 나라는 사람이 담아낼 수 있는 용량이 딱 이만큼인 것 뿐이다. 꾸역꾸역 그 사람을 담아보려 하다가 아침부터 지쳐버렸다. 


 고만하자. 안 해도 된다. 너무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자. 그냥 나는 이만큼인 사람이다. 오늘은 이만큼만 하자. 아침부터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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