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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May 18. 2024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

본질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교육의 시작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멋진 의미를 담은 행동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름이라도 불러야지 떠들고 통제 안 되는 학생들이 통제가 그나마 되니까. 그래서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거기 너, 좀 조용히 할래? 보다는 00아 좀 조용히 해 줄래? 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 자기 이름이 불린다는 것, 얼굴과 얼굴이 마주쳐도 만남은 일어나지만 이름을 불러줄 때의 만남은 뭔가 더 특별하다. 이름이 불리면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콕 집어 부르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냥 아무개가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특별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가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시를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었는데, 그 안에 관계와 소통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담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질을 꿰뚫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본질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더 깊이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 드러나지 않았지만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그렇다. 나는 본질 찾기에 관심이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싶었고 진실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과 자격증이 아니라 학벌이 아니라, 진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짜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을 위한 노력은 많이 하지 못했다. 아니 못했다는 건 부끄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안 한 것이다. 나는 늘 무언가에 중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외로웠고 쓸쓸했다. 말 못할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고, 내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현실을 외면하고 어딘가로 도피하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도 쉽지가 않았다. 거절당하고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본질에 관심이 있었다.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상반된 정치 성향의 신문 사설을 읽을 때마다 도대체 진실이 뭐지? 궁금했다. 그래서 도대체 진실은 뭐야?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과연 진실이라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명의 사람과 그들의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할 뿐, 그곳에 있었던 진실이라는 건 그 누구도 못 찾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진실을 찾을 수 있다는 가정은 틀린 가정이다. 이 세상 누구도 정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관점, 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그 제한된 것 밖에는 파악할 수가 없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며 기둥이라고 하는 맹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본질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보다 더 그 본질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 보자. 학생의 본질은 뭔가? 나의 본질은 뭔가? 겉으로 드러난 얼굴? 옷 차림새? 표정? 아니면 그 아이의 성적? 무엇이 그 아이의 본질일까. 나는 그 아이의 본질은 그 아이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몸도 건강한 몸과 덜 건강한 몸, 운동신경이 뛰어난 몸과 그렇지 않은 몸, 평가할 수 있고, 마음도 건강한 마음 덜 건강한 마음으로 가치를 논할 수 있겠지만, 영혼은 가치를 논할 수 없으니까. 영혼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영혼은 어떤 영혼이 더 낫고 못한 지를 따질 수 없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집에 가면 언제나 자기를 받아줄 수 있는, 건강한 몸과 마음의 부모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나는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의 가치가 발휘되는 곳은 세상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외롭고 쓸쓸한 아이의 영혼에 내가 다가가는 순간이다. 그래도 너는 괜찮다고, 너 그대로 괜찮다고, 그런 의미를 담은 나의 미소는 그런 아이들에게 힘을 발휘한다. 매일 지각하고 선생님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 소리 내지 않지만 표정으로 나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내 작은 미소는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 나는 힘을 발휘하고 싶다.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것도 아주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힘을 발휘하고 싶다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기적인 동기.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이기적인 동기는 나의 어린 시절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거다. 나와 같이 외롭고 쓸쓸했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서.  


 따뜻한 마음을 부어주면 그것이 영혼에 닿아서 그렇게 조금씩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건강해져 있고 생기 있어진 마음을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재작년 담임했던 반 학생이 스승의 날이라고 나에게 편지와 간식을 주고 갔다. 전학 가고 싶다고 해서 상담을 여러 번 했던 아이였는데, 마음을 잘 잡았나 보다. 나를 기억해 주다니, 고마웠다. 그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랐던 내 마음이 전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교육은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치유의 현장이다. 나도 감사를 표현해 준 그 아이를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이 회복되었으니까 말이다. 때로는 나의 이 친절하고자 하는 노력이 서비스 정신 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따뜻한 친절을 베풀자. 항상 선생님이 너를 응원할게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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