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입니다?
실은... 그저 말싸움 못하는 자!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난 차암 말을 못 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버버 하다가 내 진짜 마음도 아닌 엉뚱한 말을 내어놓는다든지 꼭 하고 싶었던 혹은 했어야 하는 말들을 아스라이 날려 보내고 뒤늦게 후회막심하는 일이 잦다. 만일 툭 뱉어 놓은 소리가 사후 자기 검열의 레이더망에 걸려들기라도 하면 한동안 스스로를 달달 볶으며 괴로워해야 하므로 아무리 봐도 난 차분히 다독이고 정돈하여 내어놓을 수 있는 글이 낫다. 실수해 놓고 자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언제나 고달프고 두려운 일이므로.
엄청난 달변이 아니어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문제는 타인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무례한 언행에 맞닥뜨렸을 때 즉 이익이든 영역이든 감정이든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그와 기싸움을 동반한 말다툼을 불사해야 할 때 발생한다. 어떻게 해도, 꿈에 그려마지않는 '차분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핵심을 짚어 상대방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서릿발 같은 파이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우선 흥분지수가 치솟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데 이 난관을 뚫고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해도, 그때부터 새로이 치열한 내전이 벌어진다. '야, 정말 니 잘못은 하나도 없는 거야? 이 말 백 퍼센트 정당한 거야? 나중에 돌이켜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해가며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를 무지하게 몰아세우는 통에 바깥의 저 사람에 대한 공격력은 심하게 쪼그라들고 만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살면서 맞닥뜨린 갈등 상황에서 대체로 전투보다는 도피행각을 일삼았고, 도망칠 수 없는 경우라면 최후까지 감정을 억누르며 버티거나 대충 소심한 수동공격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남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누군가와 다투는 일이 적다 보니 때로 아량이 넓은 자로 비치기도 하지만 실은 엄청난 오해에 불과하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공방이 치열해 남과 싸울 전투력과 사기가 부족한 것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자신이 언제나 못마땅하기만 한 것은 아닌데, 눈 가리고 아웅일지라도 '평화주의자'를 표방하고 살다 보니 남과 싸우느라 안 그래도 부족한 기력을 소진할 일이 적고 '그 순간' 감정의 일렁임을 흘려보내고 나면 '에이 됐다 뭐' 싶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아이가 폐렴으로 병원에 다닐 때 일이었다. 열흘이 다되도록 아이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입원 치료를 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간 봐주셨던 의사 선생님이 장기 휴가를 떠나시려던 참이라 아이 치료는 같은 병원의 다른 선생님께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영 이상했다. 새 선생님 문 앞 데스크에 앉은 담당 간호사분이 말이다. 한 번도 사람 눈을 쳐다보지 않고 계속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뭘 여쭈러 다가가도 도무지 알은체를 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기다리다 못해 말을 붙이면 "기다리세요!"하고 쏘아붙이고, 누가 본인 옆으로 다가오면 "앞으로 서세요." 하며 질색을 했다(간호사 옆에 서지 않는 것이 이 병원 규칙인가 해서 다른 데스크들을 둘러봤지만 아무래도 이분 혼자만의 규칙인 듯했다). 아이들 체온을 재고 그 측정치를 말할 때도, 무언가 안내를 할 때도 허공을 보고 빠르게 말하니 보호자가 잘 못 알아듣는 경우들이 생겼는데 다시 물으면 세상에 이런 무례한 경우가 다 있냐는 듯 짜증스럽게 대답을 하곤 했다. 소아과 병동이라 환자에 보호자까지 사람도 많고 일도 많아 힘드신가 싶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아이 치료만 잘 받으면 되지 하고 (되도록 혼나지 않으려 조심했으나 물론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며) 다녔는데 어느 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퇴원 후 경과를 보러 간 그날은 웬일로 대기실이 텅 비어있었고, 그분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접수를 하려고 '앞에(그동안 열심히 보고 배워뒀다)' 서서 기다렸으나 역시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적잖이 민망한 기분으로 먼저 "OOO 왔습니다." 하니 모니터를 더욱 강렬하게 쳐다보며 뭔가를 타이핑했다. 아이의 예약 정보를 찾고 계신가 해서 "O시 예약이고요, 오늘 엑스레이 찍어보자 하셨어요." 했더니 갑자기 "순서대로 할게요! 기다리세요 쫌!!" 하면서 소리를 꽥 지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앞 순서에 아무도 없었는데. 진짜 오랜만에 매우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쌓인 불만도 있겠다, '명색이 평화주의자'도 이쯤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아이가 보고 있었기에 우선 훅! 삼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갑자기 이분이 '아차!'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신호가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 눈을 보며 친절하려 애쓰는 목소리로 해야 할 일을 안내했고, 이후 속속 도착한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에게도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며 "□□이 체온 재자~" 혹은 "△△이 들어가세요~"하고 매우 낯선 태도로 응대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기분이 마구 상해버린 나는 이 같은 태도 돌변에도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분이 차고 있는 명찰 속 사진이 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지금 내 앞에서 마구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저 간호사분의 수년 전 얼굴은 차분하고, 평온했으며, 안녕해 보였다. 지금이 그때에 비해 늙었다거나 살이 쪘다거나 그런 종류의 변화가 아니었다. '아... 이 분, 어딘가 무척 아프구나. 아픈데 쉬지 못하고 매일같이 일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버겁구나.'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안녕히 계시라며 인사하고 돌아 나오는데 "아유 어머님, 네... 안녕히 가세요." 하는 풀 죽은 목소리가 슬펐다.
그 후 원래 주치의 선생님께 돌아와 이런저런 후속 진료를 보러 다니는 동안 그 간호사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그분의 빈 의자에 간호사 카디건만이 걸려있고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이 그 방 환자들의 접수와 안내까지 하느라 무척 분주하시기에 "두 분이서 세 방 일을 보시는가 봐요." 했더니 "아유, 네~ 한분이 아프셔서 계속 못 나오고 계세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날 내가 그분에게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할 말'을 속시원히 해대었으면 한동안 의기양양했을지 모르나 이후 아주 오래도록 아플 뻔했다. 역시, '명색이라도' 평화주의자로 살길 잘했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