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키즈카페 가요!

by 이백지

"아빠, 키즈카케 가요"

토요일 오전, 동료와 함께 회사 업무를 보고 있을때 전화가 온다.


"엄마는 속이 안 좋아서 못 간대요. 아빠 키즈카케 같이 가요."


아이의 서툰 발음보다 문장의 완성도가 이전보다 다듬어져 있어 놀랐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에게 물고기가 많은 자리를 내준다. 작년에 왔을때는 줄을 옮기는 미세한 손끝 감각이 무뎌 한 마리도 못 잡더니 이젠 제법 강태공이다. 아빠를 닮아 승부욕도 있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내비친다. 아빠가 잡은 물고기는 다시 편백나무 바다에 떨어뜨리는 얍삽한 기술도 얄밉지가 않다. 타요 미끄럼틀에 올라 미니 농구 골대에 던지는 공도 15%의 확률로 들어간다.

어제 아빠는 샤워하면서 폐교탐방 채널을 보았다. 지방 도시의 대학이 폐교되면서 방치되어 있는 건물이 묘하게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그 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흔적만 남아있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듯한 광경에 눈이 즐거웠다. 사회에서 필요한 교육이 아닌 일정한 자격기준치 졸업장을 판매하는 대학의 종말이 다가오는 걸까?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의 고리는 저성장 시대에 더이상 통용되는 법칙은 아닌듯 하다.

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이 많아진다. 오늘 아빠는 초등돌봄교실 추첨에 탈락된 아이들의 방과 후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태권도장에 가서 동변상련의 다른 아이들과 돌봄을 당하고 다른 학원으로 이동되어진다. 아이들은 행복할까?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 기억에 선하다.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 울던 아이를 선생님이 데리고 들어가던 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까? 이제는 제법 타인에 대한 경계도 심하지 않다. 예전엔 아빠만 믿을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경계했는데 지금은 곁을 둔다.

교육에서만큼은 아빠의 입김은 아이에 닿기 어렵다. 전적으로 엄마의 영역이다. 함께 농구 동호회 활동을 하던 후배는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낼 계획이라 한다. 이제 나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할때가 다가온다. 인근에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도 있다. 파란 유니폼 입은 아들의 모습도 상상해 보지만 엘리트 체육의 재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빠는 그 길이 방송활동을 하는 유명인들보다 험난한 길이라 여긴다.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다. 어른들은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를 이리저리 쫓아다니기도 한다. 핸드폰과 놀아주는 엄마보다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엄마들이 예뻐 보인다. 아빠는 생존과 경쟁에서 내 아이가 우위를 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아직 티를 낼 단계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아직은 충분히 행복해하고 웃으며 놀 수 있는 나이이다. 아들의 마스크 벗고 노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본지도 오랜만이다. 집에 돌아오니 다시 어부바 헬스장이 열린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놀았다는 개념은 깨어있는 시간엔 찾아보기 힘들다. 히딩크처럼 늘 즐거움에 배고픈 아이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거리가 아닌 실내 놀이터에 울려퍼진다. 세상은, 거리는 안전하지 않아서일까? 혹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거리를 민폐라 여기는 엄마들이 많아져서일까? 국민학교 시절 오전반, 오후반으로 학교에 다녔던 나로서는 현재의 아이 키우기 버거운 저성장 시대의 육아가 첫 직장처럼 야근의 연속이구나. 잘 자거라 아이들아!




아이가 집중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참 재밌다. 저 게 뭐라고 ㅋㅋㅋ 하지만 나 역시 저 시절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설계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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