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벌레로 보여요. 어머니 눈엔 안 보이세요?'
집 앞 나무엔 벌레가 많다. 벌레들은 자신의 몸을 숨길 은신처가 필요하다.
"자네 다른 여자 생겼는가?"
장모님께서는 '밥 먹었어?' 인사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으셨다. 아내의 출처인 분께 다른 여자가 생겼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는 불편하다. 매스꺼움이 밀려왔다. 손가락에 피를 내어 혈액순환을 도와주면 체기가 사라진다. 다른 여자가 있던 건 아니었다는 오해는 풀렸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딸을 아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받아내지 못하셨다.
아내는 외부 일정이 잡히면 몇 달 전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동성들만 만나는 자리는 내부 일정이라 다이어트가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집순이로 진화할 마음이었다. 전업자녀였던 아내는 전업주부의 길로 이직하려 했으나 남편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해 왔다. 남편은 결혼 후 부쩍 내면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외벌이로 지내면서 아내가 반반 집안일을 요구하니 슈퍼맘이 된 기분이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책임의 전가였다.
"주말 동안 당신이랑 놀면 아이들 감기 상태가 더 악화돼. 당신이 책임지고 아이들 케어해. 내일 연차 써"
판사인 아내는 남편에게 유독 무거운 판결을 내렸다. 두 아이의 언론 중재 위원회 업무를 볼 때는 성수대교 위의 솔로몬 같았다.
"서로 사랑해~ 라고 말해줘!"
고자질 민원을 슬기로운 판결로 진화했다. 아내 역시 집안일과 육아가 자신에게 전가되는 걸 원치 않았다. 전업 집순이로 지내려면 남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무거운 형량을 내릴수록 남편은 배달일을 열심히 나갔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기본 단가가 더 높다며 밥을 먹으면서도 실시간으로 건당 단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고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는 하나 내 어머니의 유언처럼 아내와 합장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유언을 접수했지만 들어주시지는 않으셨다. 선산에 함께 묻히길 소망하는 아버지께서는 필요에 의해 다른 여자분을 만나고 계신다. 선산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합장을 기다리고 계신다. 남편의 퇴근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아버지께서도 퇴근 후 식사 자리를 마치시고 같은 이불을 덮듯 합장하러 가시겠지. 그 자리에 사별 후 만나시던 분도 오실지 사뭇 궁금해진다. 우리 기족은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사별 후 만나시는 분과 왕래하지 않고 있다. 호칭도 따로 드리지 않았다. 여자에게 다른 여자는 그냥 다른 여자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의 롤모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