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망가진 부부의 특징 중 하나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풍선처럼 커진다는 점이다. 신혼 초 였을까? 어쩌면 그 이전부터 풍선은 부풀기 시작했다. 기대보다는 실망으로 말이다. 이미 복선은 준비되어 있었다. 결혼 전 그녀의 자취방에 걸려있는 잠옷은 돕바처럼 큰 사이즈뿐이었다.
'나는 이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위험에 빠져 의식을 잃은 아내를 들춰업고 병원으로 갈 수 있을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누르는 게 안전한 선택으로 판단, 결혼은 내게 비겁한 선택지였다.
'주차 자리 있네' 하고 가까이 가면 경차 또는 킥보드가 주차되어 있다.
6층 엄마와 비슷한 발가락을 지닌 모자 쓴 엄마를 무인점포 앞에서 만났다. 아이 엄마는 오늘 모자를 쓰지 않았다. 덕분에 지난 번 보았던 발가락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내와 결이 같은 무지외반증이었다. 유모차 짐칸에 담겨있는 어린이집 가방에 태권도 노란띠가 보인다. 아이 이름이 오바로크 되어 있다. 외자였던 이름이 시체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엄마의 심장에 오바로크된 아이는 또봇에 심취해 지나가는 차마다 또봇 x랑 닮았다, y랑 닮았다, z랑 닮았다며 소리쳤다. 아이치곤 목소리가 중저음에 성량도 제법 컸다. 닥스훈트의 울림통 같았다. 아들은 어린이집 가방 옆에 누워있는 또봇 장난감을 변신시켜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또봇킹 아드님은 매몰차게 만지지 말라며 화를 냈다. 1년 전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동일한 포지션이다. 아직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 딸에게는 또봇 장난감도 선물로 줄 수 있어 보인다. 목소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엄마였다. 엄마는 아이처럼 성량이 크진 않지만 특유의 울림방식이 비슷했다. 무지외반처럼 언어의 파편이 밖으로 퍼져나갔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나에겐 적의감 없는 말투로 대하셨다. 반면 아버지께는 날카로운 채찍처럼 말씀하셨다. 지금은 내가 남편이 되어 아내의 날카로운 말들을 수집하고 있다. 아내는 가끔 아이들에게도 언어의 총 칼을 휘두른다. 아내의 칼끝이 서늘해질때면 순사처럼 계급의 무게에 도취된듯 보인다. 침대에 누워 아들에게 물었다. 어린이집은 재밌냐고.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아이랑 노는 건 재밌지 않냐 물었다. 그건 좋지만 다른 친구와 노는 건 시덥잖아 보인다. 이름만 말해도 몸을 배배 꼬는 그 아이는 아들과 같은 이름을 지녔다. 다행히 성은 다르다. 동성도 아니고 동일한 남성도 아니다. 오늘은 바보와 멍청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이를 지칭한다고 말했더니 딸이 물었다.
"아빠 나 멍청이야?"
감당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딸은 아들처럼 숫자를 또렷이 외질 못했다. 11 다음 13을 외쳤고 처음부터 다시 세 번을 반복하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11 다음 'Y'라고 말했다. 선잠의 도입부에 또봇Y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 내가 아이들과 숫자와 단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니 참 오래도 버텼다. 아이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약속이 있다며 아이들 어린이집 하원과 아이들 저녁식사를 부탁했던 아내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내게 키스했다. 하루 종일 집을 비운 미안함때문이란 걸 알고 있다. 아내를 들춰업거나 밀어낼 용기가 없던 나는 벤치프레스 80kg 미만잡이었다. 아내의 흉통과 장대한 어깨에 짓눌린 나는 안전한 잠을 선택했다. 건강한 부부의 입술은 닥스훈트의 코처럼 촉촉하며 길쭉한 밤을 보낸다. 하지가 지난지 오래지만 여전히 밤은 짧다. 침 묻은 입을 몰래 닦아내었다.
독버섯을 발견한 딸이 버섯처럼 솟아 오른다. 아내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불구자처럼 솟아오를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가 지나도 하지정맥류는 배배 꼬여있다. 부부의 관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