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없는 가난

by 이백지

가난에도 진정성이 필요하다. 아내는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이렇게 힘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매 달 230만 원 내외로 돈을 가져다 주었는데 저번 달엔 150만 원밖에 줄 수 없다고 사전고지했다. 아내는 이번에도 장모님께 부족한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번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생활비의 부족분은 강아지 치료비였다.

'나야 아니면 강아지야?'

비교 대상이 불륜 상대였으면 고민이라도 해보았을텐데 동물과 비교 대상이라니 서글펐다. 아내는 강아지를 선택했다. 지난 5월 강아지 파양을 생각해보자는 내 의견에 아내는 거부 의사를 표했다.

"내년에 나 취업할 거니깐 내년까지는 어떻게든 키워보자"

'그럼 당신도 고통분담해야지'

내가 내린 결정은 강아지에게 들어가는 비용만큼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는 돈을 줄이는 것이었다. 지난 8월 각막이 손상되어 치료비로 210만 원이 들었으니 3개월 할부에 대한 비용을 제하고 170만 원을 생활비로 주었다. 아내는 요즘 매일 저녁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마신다. 장모님이 지원해 주신 생활비의 일부가 아내의 술값 3800원과 족발&보쌈집 사장님 지갑으로 전달되고 있는 구조다. 이 역시 생활의 일부다. 진정성 없는 가난타령일지라도 말이다. 강아지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나는 다음 달 그리고 또 그 다음 달 카드값을 갚기 위해 퇴근길에 음식을 배달한다. 집에 있는 시간을 줄여 강아지를 키우는 셈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강아지와의 영역다툼에서 밀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강아지를 버리고 아빠를 키우자고 말했던 가장의 목소리는 강아지 성대수술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래, 차라리 강아지에게 서열싸움에 밀리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카드값이라는 서열에 밀리지만 말자. 다람쥐처럼 음식을 나른다. 아내가 시킨 배달 음식은 다른 가장의 생활비로 쓰일 것이다.



아이들은 인형과 자동차를, 아빠는 배탈통을 쳇바퀴 위에 얹는다.





나는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옥상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시골에 버리셨다. 그러나 명절때 찾아간 할머니 집에도 뽀삐는 보이지 않았다. 100km가 넘는 거리를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집이 진도도 아니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밥은 잘 먹고 비라도 피할 수 있을지 뽀삐가 걱정되었다. 아버지께서 다른 집에 주신 건지 산에 혼자 남겨두고 가신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자식 교육을 위해 좋은 동네의 좁은 전세로 이사가기에는 강아지는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강아지는 옥상이 없는 다세대 빌라에 입주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강아지를 걱정했지만 아버지를 걱정하진 않았다. 늘 아버지의 사랑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동이 트기 전 출근하시고 늦은 밤 귀가하시는 모습 또한 당연해 보였다.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는데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을수록 아버지는 가족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군인처럼 느껴진다. 분단 국가의 군인말이다. 가족 구성원이 따스한 집에 머물러 당연해 보이는 평화를 누리는 것은 군인 아저씨들의 노고와 경계 근무 탓이다.




비무장 지대에 숨어 아들에게 암구호를 묻는다. 풀잎을 빻아 약을 만든다고 했다. 어디서 약을 파나 했더니 담장에 서서 담력있고 담대하게 돌을 내려찍는다. 아빠 역시 너를 찍는다.




음식을 배달하고 집에 들어와 아들을 씻긴다. 아내는 왜 딸은 씻기지 않냐며 화를 낸다. 딸은 옷을 벗고 TV를 보고 있다. 이것만 보고 씻으러 가야지 라고 생각했겠지만 방송은 24시간 연속 상영이다. 나는 딸의 취미생활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는 딸 아이를 씻기러 욕실로 향하며 소리친다.

"내일부터 당신 빨래는 당신이 직접 돌려!"

그러기엔 이번 한 주 내내 욕실에 수건이 없었다. 건조기에 들어있던 수건들은 머리카락이 보일까봐 방에 숨어지냈다. 숨은 수건을 찾아 땀에 절은 얼굴을 훔친다. 집에서는 최대한 숨 죽이며 살고 있다. 아내의 호통은 보쌈 두 개가 담긴 접시를 싱크대에 넣어두지 않아서였다. 내 저녁 식사는 누군가가 배달해준 또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준 아내의 안주였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자레인지에 돌려봐도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대하는 아내처럼 차갑다. 분명 따스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월급날 받은 숫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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