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을 벗고, 바라클라바를 벗었다. 찬 기운이 시원하다. 익명의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현실세계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배달통 안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꺼내 병원으로 향했다. 건물 승강기에는 환자들이 가득했다. 안과, 피부과, 신경과, 정신의학과 등이 모여있는 건물이다. 지하철 출입구 앞이라 임대 문의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승강기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은 건 빨리 내려 접수하기 위함이었다.
"대리처방 받으러 왔거든요."
아내와 내 신분증 그리고 가족관계 증명서를 달라고 했다. 내 앞에 계셨던 노인 분께서는 어떤 일로 오셨냐는 질문에 자신의 상태가 온전한지 확인, 심리테스트를 받거나 그런 진료를 받을 수 있냐는 말을 너무 느리게 중언부언 하셨다. 치과나 다른 부분은 매 년 검사를 받고 있다고도 하셨다. 접수 직원은 바로 옆 신경과 의원에 문의해 보라며 접수를 거절했다. 노인이 떠나고 여직원 둘의 작전회의가 들렸다. 접수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접수를 거절당한 노인은 이번엔 신경과 의원에서도 접수를 거부당했다며 다시 정신의학과로 오셨다. 여직원 중 한 명이 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가보라 외쳤다. 방음을 위해 스폰지가 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고시원처럼 좁은 방 안에 의사 선생님께서 마스크를 쓰고 갇혀있었다. 책상에 몸을 반쯤 가리고 마스크를 쓴 모습이 배달할 때 헬멧과 바라클라바로 눈만 보이는 모습과 일치했다. 정면에서 보면 오토바이에 하체가 가려지는 부분도 유사했다. 차분한 어조로 아내 분의 특이사항을 물으셨다. 하지만 내가 아내의 상태를 알고있진 않았다. 그저 6주치 약을 부탁했을뿐 자신의 상태가 호전되었거나 변화된 부분을 소상히 알려주진 않았다. 이미 의사 분께서는 아내와 많은 대화를 했을 터이니 어쩌면 남편인 나보다 아내에 대해 더 잘 알고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내를 순순히 "대신 부탁드리겠습니디."하고 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 좁디 좁은 감옥같은 방에 X-Man 영화의 찰스 자비에 교수처럼 보이는 분이 계실줄 알았다. 민간 고해성사 코너엔 신부님도 역술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능력 대신 저번에 복용했던 약과 동일하게 처방해주시는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아내는 이 곳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따뜻해졌을까? 내면을 보려면 대화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보기 위해 듣고 말해야 한다는 점이 어색했다. 마음은 눈이 아닌 귀와 입에 반응하는 모양새다. 방음처리된 문을 열고 현실세계로 나오자 정신 상태를 체크해 보고싶다는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접수하시는 분의 소견은 이곳은 보통 아픈 환자분들이 방문하는 곳이지 자신이 아픈지 안 아픈지를 확인하러 오는 곳이 아니라 했다. 아내는 자신의 내면이 아프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하지. 나이 들수록 여기저기 안 아플 수가 없는데, 일곱 살 아이들도 아빠 이백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다고 지난 밤 말했었는데 그 나이 먹도록 건강하다면 그 건 축복이 아닌 저주겠지. IQ처럼 누군가는 미래에 그 나이로 진입하겠지. 아빠랑 오랫동안 같이 살고싶다는 마음이 딸 아이의 입에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