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허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열흘 넘게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찾은 한의원에서는 운전시간이 허리에 무리를 주었다고 판단했다. 하루 많게는 14시간 일을 했으니 운전 시간만 따져봐도 못해도 5~6시간, 주말엔 9~10시간은 차에 앉아있었던 셈이다. 평소보다 2시간 일찍 들어온 집에서는 어제와 동일한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밥을 먹으며 놀고 있다.
이 놈의 집구석 내가 이래서 집에 들어오기가 싫지. 처음엔 이런 마음이 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새벽내 갈아주었던 기저귀가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거나 어제 먹은 식기류가 싱크대에 쌓여있어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 정리하고 청소하기를 하였더니 그게 당연시 되어 버렸다. 밤 9시에 퇴근하고 집에 와도 아내는 여전히 술을 마시다 안방에 들어가 누워버리고는 아이들 샤워나 양치를 내게 부탁했다.
20대의 대부분을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보낸 아내에게 남편의 집안일 도와주기는 기본값인 모양이다. 최근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국비 지원으로 간호조무사 1년 교육 과정을 이수해 보겠다고 한다. 자기도 밖에 나가 일하면 남편 저녁은 안 차려 줄 거라는 당당한 외침에서 나는 가늘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작년엔 공무원 준비한다고 했었고, 재작년엔 온라인 게임 아이온 아이템 거래로 새벽내내 게임만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새벽에 자다 깨어 화장실에 다녀올때면 방 한 구석 밝은 빛에 이웃집에서도 항의가 온 터였다. 암막커튼을 사서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게임을 하던 아내는 함께 게임하던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 게임을 접었다.
하지만 인생의 동반자 술은 접지 못했다. 남편의 허리가 접혀도 그 걸 워커홀릭, 자기만족이라 생각하는 아내는 남편의 장시간 근무가 아이들때문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듯 하다. 그저 자신이 일도 안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휩싸여 신세한탄이나 하며 타인의 사연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이나 게임방송 등을 보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 건지...
한 달에 3일을 쉬고 매일 12~14시간 일을 한 허리는 아이고 형님 이러다 저 죽어요 하고 앓는 소리를 하는데 그 모습에 아내는 그러다 아이들이 커서 아빠 찾지도 않는다며 적당히 하란다. 적당히 편하게 살면 나도 좋지. 맞벌이로 월 천 버는 거면 적당히 그렇게 살겠는데 외벌이로 월 400에 아이 둘, 강아지 둘 키우기에는 매달 카드값 해결하기도 버거우니까 이렇게 사는 거지. 나도 친구들처럼 주말에 골프도 치고 캠핑도 다니고 싶지. 근데 외벌이로는 주말에 배달 일하며 지내야 통장이 살아있어. 내가 죽어야 나오는 보험금처럼 아빠의 삶이 그래.
아내의 먹다 남은 술상을 더이상 치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