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쓰는 편지

아들, 드라마는 보지 말거라.

by 이백지


아빠는 말이지. 드라마 스토리처럼 멋진 꿈을 가지고 있었단다. 가난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이성을 만나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불행히도 아빠는 재벌집 자녀도 아니었고 그저 중소기업을 다니는 일개 직장인에 불과했지. 이 말인 즉슨 누굴 돕거나 희생하면 자신의 인생도 휘말릴 수 있는 잔잔한 물결이었다는 거지.


얼마 전 너의 엄마에게 물어보았어. "다시 자취하던 시절처럼 고시원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할 수 있겠어?"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 중장년층의 고시원 생활 비중이 처음으로 20~30대 청년층보다 많아졌다는 통계를 보고 물어본 거였어. 너희들 태어나기 전 엄마와 이혼 이야기가 오갈때 엄마가 2억짜리 살 집은 마련해 달라했었는데 2평짜리 고시원 생활이 될 수도 있단 셈이지.


아빠의 로망은 전제조건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어. 기업을 물려받거나 최소 대기업 본부장 정도의 연봉 수준으로 타인의 삶을 구제하는 거면 모를까, 일개 중소기업 직장인이 저런 꿈을 꿨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구나. 최근에 은행권에서 희망퇴직자를 모집한다고 하더라고. 대략 16년차 정도의 은행권 직장인에게 3년치 연봉을 쥐어주고 회사에서 퇴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개인당 약 4억원 가까이 퇴직금이 책정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더라고. 아빠가 얼마 전 8년 정도를 근속한 회사에서 퇴직금 소송으로 받은 돈이 2300만원이란다. 그것도 회사에서 법원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회사와 협상하면 1800만원 남짓을 주겠다고 하는 걸 버티고 버티어 소송까지 진행해 받은 돈이란다. 집단 소송에 참여하지 않거나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둔 이들은 단 한 푼도 퇴직금을 정산받지 못했단다.


너희들 키우려면 현재 1억원 전세 대출을 제외하더라도 4~5억 원은 더 끌어써야 할 것 같은데 아빠의 외벌이 노동소득만으로는 현상 유지도 힘들어 보인단다. 그러니 부디 건강하게 너무 공부 잘해서 하버드 갈 생각 말고 적당히 손흥민 정도 월드클래스 반열에 살짝 들까 말까 한 정도로만 커주렴. 아빤 노후에 전기차로 음식 배달이나 하면서 소소하게 손주들 과자값이나 벌면서 지내고 싶구나. 폐지는 요새 돈이 안되어서 반나절 리어커로 일하면 9000원 정도 수입이고, 구리나 고철 따위는 시세가 좋은 편이라 힌주는 kg당 4500원이나 하는 좋은 시절이란다. 좋은 꿈 꾸렴. 우리 아들, 그리고 엄마 닮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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