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순오 Feb 13. 2023

가출은 싫다

내가 여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엄마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가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무런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디로 간다는 얘기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1년 동안 엄마는 소식두절이었다.


나는 그해 여중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 반배치고사를 쳤는데, 깡시골에서 읍내로 진학을 해서는 전교 3등을 했다. 성적순으로 1등은 1반, 2등은 2반, 3등은 3반 반장을 했기에 나는 3반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 학교까지 거의 7km를 아침저녁으로 걸어서 통학했던 나는 반장으로서  환경미화도 담임선생님도 도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봄소풍 갈 때 선생님 도시락도 가 없었. 당시만 해도 소풍 때 선생님들 도시락 싸가는 것은 장들의 몫이었고, 그것은 전통처럼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내 도시락도 제대로 싸가기 힘든 상황이어서 김에다가 밥 놓고 김치 같은 것을 넣어서 둘둘 말아가지고  싸가지고 갔을 정도였다.


나는 그해 사춘기가 찾아왔다. 초경이 시작되었고 늘 우울했다. 사는 것이 재미없고 의미가 없어 보였다. 공부는 잘했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읍내 애들과의 경쟁에서 늘 뒤처졌다.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자주 죽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버지는 늘 술과 노름에 절어 살았고, 할머니와 두 살 아래 여동생은 아버지 대신 농사일을 했다. 여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도 제대로 마치지 못 학교를 그만두고 할니와 함께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험한 농사를 지었다. 벼도 심고 베고, 보리도 뿌리고 거두고, 콩밭도 매고 수확도 하고, 깨와 들깨도 털고, 무와 배추도 키워서 김장도 하고, 담배밭도 매고. 담뱃잎도 따서 려서 포장도 했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농사일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갔고 저녁 늦게 집에 왔다.


마가 집을 나간 뒤에는 읍내에 사시는 외할머니 집에서 잠시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읍내시장에서 제수품 가게 하시는 외할머니는 아주 인색했다. 밥은 제때 차려 주셨고 오징어포나 미역귀, 멸치나 새우, 문어 다리 등 내가 먹는 것은 무어라 얘기하지 않았지만,  용돈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학교 앞 가게에서 과자도 사 먹고 새 학용품도 사고 그랬지만 나는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그냥 할머니가 사다주시는 품질이 별로 안 좋은 학용품 썼고, 초등학교 때 쓰다 남은 것 이어서 썼다.   


엄마가 집을 나간 경험을 해서 그런지 나는 집 나가는 일, 일 가출은 정말 싫다.

"동생들 잘 돌보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라. 엄마가 돈을 벌어서 곧 같이 살자꾸나."

어느 날 나에게 엄마의 편지가 한통 날아들었다. 그 뒤로 몇 번의 편지가 나에게로 더 왔고 아버지에게도 왔다. 아버지가 술과 노름을 끓으면 엄마를 다시 만나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엄마를 찾게 되었다. 아버지가 엄마한테서 온 발신지 없는 편지 보고 엄마를 찾아 나다. 신림동 우체국 소인이 찍힌 걸 보고 서울에 가서 수소문해서 관악산 비구니승들이 사는 절에 가서 엄마를 만난 것이다.


엄마술과 노름을 는다 아버지의 다짐을 받고 시골집을 다 팔아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 논 몇 마지기는 팔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붙여서 농사를 짓게 했고, 서울 사는 동안 우리 논에서 지은 좋은 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가게가 딸린 방 한 칸짜리를 2개 얻었다. 당시 돈으로 보증금 30만 원 짜리였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살림집으로, 하나는 엄마가 운영하는 당으로 사용다.  상가라서 주인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살림집은 할머니와 나, 여동생 둘에 남동생 둘까지 6 식구가 살기에는 방이 너무 작았다. 다이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곳 내가 공부한다는 이유로 사용했다. 다락 일부는 짐을 넣어두었고 나는 한쪽을 사용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다락은 문이 없이 전면이 터져있었는데 내가 자다가 자주 밑으로 떨어졌다. 식당 방은 주 작았지만 아버지와 엄마가 생활했다.


서울로 이사 온 뒤 제일 먼저 둘째 여동생이 집을 나갔다. 가방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야근이 잦아 늦게 들어오곤 하더니 급기야 숙소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동생은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다가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20살에 결혼을 했다.


째 여동생은 가난한 우리 집 형편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농구 특차로 들어가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중거리슛 잘했지만 장신 선수가 유리한 농구를 대학 이후에는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집을 나가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나는 가출하지 않고 끈기 있게 집을 사수했다.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라고 아무리 닦달을 해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내가 학교를 그만 두면 미래가 없을 것 같았고, 집을 나기면  잘못된 길로 빠질 것만 같았다. 당시 일기에 자주 적어놓던 대목은 '학교 가면 천국, 집에 가면 지옥'이라는 글귀다.


그렇게 나는 가출이 싫었다. 내가 가출하지 않고 집을 사수했기에 둘째 여동생 아래로 셋째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동생들 교육에 관한 한 내게 물어보았는데,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 대체로 부모님이 내 말을 따랐다. 나는 진심으로 동생들이 다 잘 되기를 바랐다.


둘째 여동생이 사귀는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도 부모님보다 나한테 먼저 개하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둘째 여동생이 사귀는 남자는 호남형이고 성실하고 사람이 너무 좋아 결혼하면 잘 살 거라고 했다. 셋째 여동생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는 여동생이 아깝다고 했지만 이미 둘은 헤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 2명 중1명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고, 그 래 남동생은 산소통에 들어갔다 나와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막내 남동생은 엄마가 나이 40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이다. 큰딸인  나하고는 18살 차이가 난다. 18살에 시집와서 19살에 나를 낳은 우리 엄마와 내 나이 차이만큼 나와 막내 남동생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우리 막내 남동생은 엄마와 아들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 보일 정도이다. 


실제로 우리 막내가 학교 다닐 때는 내가 엄마인 것처럼 학교에 자주 갔다. 입학식 졸업식도 거의 다 내가 할머니와 함께 가서 사진도 찍어주고 밥도 사주고 그랬다.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해서 여행을 다닐 때도 우리 애들과 함께 막내 남동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 한번 쳐다보고  어린 우리 애들 쳐다보고, 우리 남편 한번 쳐다보고 막내 남동생 한번 쳐다보곤 했다. 아마도 내가 애 딸린 남자에게 재취를 간 줄로  짐한 것 같았다.


결혼 후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울 남편이 실직을 하고, 1년 만에 곧 IMF위기가 오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학벌이 좋은 우리 남편은 기술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었다. 결혼 전에도 집안에 가장 격이라서 의가사제대라는 걸 해서 군생활도 제대로 안 해보고 힘든 일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우리 남편은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안에서만 생활했다.

  

나는 논술지도로 엄청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생활은 곧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 둘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돈은 소소하게 들어갔다. 내가 한 달에 당시 돈으로 250여 만을 벌었지만 늘 부족했다. 


나는 수없이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참고 참았다. 우리 엄마가 집을 나가서 내가 사춘기를 홀로 보냈던 일을 생각했다.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엄마의 가출은 내게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절대로 엄마가 집을 나가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게 나는 가정을 지켰다. 아이들은 바르게 잘 자라 주었다. 오히려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독립성이 있는 아이들로 커나갔다. 어디를 가도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갔다.


요즘 아이들은 가출이 로망이라는데, 나는 가능하면 가족은 함께 모여사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이다. 함께 살아야 서로를 통해  힘든 일도 인내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훈련이 된다.


가출은 싫!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가출하지 않고 공부한 일, 그리고 가출하지 않고 가정을 지킨 일이다. 금은 옛일을 회상해 보며 감사를 드린다. 생각할수록 ' 가족'이라는 이름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가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