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순오 Feb 27. 2023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일은 최고의 선택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의 신비에 가깝다. 


중학교 1학년 겨울, 집을 나간 엄마를 다시 찾으면서 우리 가족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얻은 가겟방 바로 옆에 편물가게가 있었다. 예쁜 니뜨 옷이며 가방 같은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미싱으로  드륵드륵 스웨터도 짜고 원피스도 짰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너, 참 예쁘게 생겼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로구나!"

"아, 네. 안녕하세요? 너무 예뻐서 구경하고 있어요."

나는 쭈뼛거리며 문밖에 서서 연신 감탄을 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구경하렴!"

편물가게 아주머니는 맛있는 떡과 과일도 주셨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불쑥 한 마디를 더 하셨다.

"너, 아줌마 따라서 교회에 가지 않으련? 마침 내일이 주일이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이사 간 다음날 바로 그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는 영광교회였다.


그 아주머니 부부는 애가 없었는데, 나를 자기 딸이라도 된  잘 챙겨주셨다. 방학 때는 구역예배도 데리고 다니고 성탄절 새벽송도 함께 다녔다. 교회에서 전교인 수련회를 하면 꼭 우리 중등부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주고 가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두 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고마우신 분들 덕분에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 교회를 떠나오면서 그분들과도 소식이 끊어졌다.


노름과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로 인해 너무나 힘들었던 청소년기를 보내서도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잘 견뎌나갔다. 


우리 교회는 성도가 약 200명 정도 되는데,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다. 성경퀴즈대회와 성경암송대회 같은 것도 자주 열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까지 통틀어서 대회를 열곤 했는데, 당시 내가 1등을 하기도 했다. 상금으로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집이 30만 원에 방 딸린 가게 2개를 얻은 걸 보면, 내가 받은 2만 원이라는 상금은 꽤나 큰돈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내가 전교인 앞에서 장학금 받는 걸 보셨다. 물론 그 후로 아버지는 다시 교회에 나오지는 않으셨지만 말이다.


나는 신실하신 그 아주머니 부부를 따라서 새벽기도에도 다녔다. 교회에 다니자마자 새벽기도를 다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암송대회 덕분에 말씀을 술술 외웠다. 시편 1편, 23편, 로마서 8장, 고리도 전 13장 등은 당시 외운 말씀들인데 지금도 잊지 않고 외우곤 한다.


그렇게 나의 기독교 신앙은 조금씩 자라 갔다.

고등학교 진학을 이화여고 공동학군으로 하게 된 것도, 학교를 그만두려는 시점에 교목실 옥합장학금을 받고 계속 공부할 수 있게 것도, 이화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이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가정을 잘 지키고 만학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주님의 뜻이었다. 외할머니는 원불교, 친정엄마는 불교, 시어머니는 남묘호랑객교, 이런 깊은 우상의 터에서 어떻게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어떻게 제1대 신앙인이 되었을까? 아무래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지 싶다.


신학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만일 내가 20대 초에 신학을 했다면, 이 길이 아니구나, 싶어 곧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40대 후반에 신학을 했기에 잘 이겨다. 이건 아니다, 싶어도 잘 참아냈다.


평신도가 가는 길과 목회자가 가는 길은 난이도가 다르다. 평신도 시절에는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기도하는 것마다 곧 응답받고는 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더 잘 이루어졌다. 기도해 주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기도하지 않은 내 기도제목까지도 응답이 되곤 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고 보니 웬만한 일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잘 응답이 되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위에서 아래에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도 많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다. 친한 친구의 배신도 있다. 가족의 반대도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도 삶의 방식도 그렇게 다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저음부터 신학을 할 때 목회보다도 글 쓰는 일을 더 잘해보고 싶어서였기에 지금 잘하고 있다 여긴다.  교회와 기관에서의 사역은 10여 년 한 걸로 만족한다. 사이란 이런 것이다, 경험해보라고 주신 것이라 여긴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그만큼 써주신 것이 그저 황송하기만 하다.


그 무엇을 하고 살든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두고두고 찬송할 일이다. 이 세상 다한 후 죽음의 문을 열고 저 천국에 들어가 영생의 세에 이를 때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일, 그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과 출산! 안 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