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산행 흔적

금무박 지리산 천왕봉

by 서순오

2019년 6월 나는 거의 1년 이상 매주 토산에서 훈련한 산행 실력을 믿고 다른 산악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토산은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지만 사실 집결지가 너무 멀어서 아침에 갈 때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자주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했다. 그래서 이곳저곳 또 인터넷 검색을 해서 살펴보니 신갈과 죽전 하행 정류장에서 픽업을 해주는 산악회가 많다. 집에서는 약 40여 분~1시간 정도면 버스 한번 타고 바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나는 햇산의 금무박 지리산 천왕봉 산행을 신청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둘 씩 셋 씩 함께 온 모양인데, 나는 늘 그렇듯이 혼자서 산행 신청을 했다.
금무박 지리산 천왕봉 산행은 6/7(금) 밤 11시 20분 죽전에서 버스에 탑승하여 6/8(토) 새벽 4시 성삼재, 5시 백무동에 도착했다.
A팀은 성삼재에서 출발해서 지리산 종주를 하고 천왕봉 오른 후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인데 총 35km이다. 반 정도가 그 코스를 선택했다. B코스는 백무동에서 출발해서 장터목 지나 천왕봉 오른 후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로 총 13.5km이다.
새로운 코스 하나 더, C코스는 두 분 대장님이 선택한 코스인데, 새벽 5시 백무동 출발해서 세석~장터목~천왕봉~중산리 코스로 총 17.5km이다. 나는 처음 오르려고 했던 B코스를 변경해서 C코스를 가게 된다. 총 9시간의 산행인데, 두 분 대장님(한 분은 오늘의 리딩 지아 대장님, 한 분은 내일의 리딩 희망봉 대장님이신데 산행이 취소되어 오늘 함께 오셨단다.)이 섬세하게 리딩 해주신다.
지리산 천왕봉 산행은 비 온 뒤라 초입부터 계곡물이 불어 가내수 폭포 물소리가 힘차고 경쾌하다. 쪼로롱 포로롱 노래하는 새소리와 함께 걷는다.
새벽 시간 1시간 정도는 일출 전이라 헤드라이트를 켜고 오른다.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길은 계속해서 급경사 오름길이다. 길이 거친 구간도 꽤나 있다. 처음부터 너무 힘이 든다. 세석으로 오르는 4km에도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세석에서 그냥 거림으로 내려가나 어쩌나 하다가 장터목까지 간 후 결정하기로 하다가 드디어 천왕봉까지 오른다.
세석평전은 운무와 들꽃이 잘 어우러져 원시미를 자아낸다. 장터목 오르는 길에는 고사목도, 쭉쭉 뻗은 주목들도 멋지고, 군데군데 우리나라 토종 진달래라는 털진달래가 무리 지어 연분홍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천왕봉 오르는 길에 제석봉에서 인간의 탐욕이 부른 산불로 인해 생겨난 고사목들을 본다. 통천문 지나 천왕봉에 이르니 지리산 가득히 낀 운무가 풀리며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풀풀 날리는 구름 사이로 마을과 숲이 열리는데 꼭 하늘 궁전 같다.
천왕봉 인증숏 찍는 장소에는 줄을 서야 할 정도다. 한 10여 분 정도 기다린 후 기념샷을 찍는다. 한참을 운무 속에서 조망을 하면서 "야하! 멋져 멋져!" 저마다 탄성을 지른다. 리딩 해주신 희망봉 대장님도 '지리산 여러 번 올랐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고 하신다. 정말 최상의 풍광이다. 꿈꾸고 바라던 그 이상이랄까!
"이왕 산 타는 거 100대 명산 이런 거 찍어 보셔요. 목표가 있으면 보람도 있고 훨씬 좋지요."
다른 사람들이 블랙야크 100대 명산 타월 같은 걸 들고 사진을 찍는 걸 보고 "저게 뭔가요?" 내가 물으니까 희망봉 대장님이 권면을 해주신다. 그렇게 시작은 참 좋았다.
그런데 나는 중산리 쪽 하산길에서 거의 반 이상 내려온 지점에서 그만 발이 살짝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주 조심조심 걷는 데도 신발에 달라붙은 진흙 때문에 바위 위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린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팔을 짚지 않으려고 했다. 예전에 실내에서 아주 가볍게 넘어졌는데 팔을 짚어서 팔이 한번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내 잠재의식 속에 팔을 짚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 바람에 얼굴이 땅에 닿으면서 안경과 선글라스를 겹쳐 쓴 것 때문에 얼굴을 두 군데나 다치고 말았다. 얼굴 위로 줄줄 피가 흘러내렸다. 나중에 보니 미간 한가운데가 세로로 약 1cm 정도 찢어지고, 콧등에 안경을 받쳐주는 부위가 조금 파여서 살점이 뜯겨 나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안경 두 개는 깨지지도 휘어지지도 않고 멀쩡했다. 희망봉 대장님이 배낭에서 붕대와 소독약 등 상비약을 꺼내 응급조치를 해주셔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하산해서 지리산탐방센터에서 상처를 깨끗이 씻고 다시 응급처방을 했다.
"아무래도 상처가 깊어 흉터가 날 것 같아요. 집에 가지 마자 병원 들러서 꿰매야겠어요."
지리산탐방센티 안전요원들이 얘기한다.
그래서 나는 수원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해서 마중을 나오도록 했다. 근처 병원으로 가보니 야간에 수술을 안 한단다. 119 구급대가 막 환자를 싣고 들어온다.
"지금 시간에 혹시 상처 꿰매는 수술 하는 곳 아시나요?"
나는 남편에게 배낭을 맡기고 119 구급요원에게 다가가 묻는다.
"잘못하면 제 얼굴에 흉터가 나게 생겨서요. 상처가 굳으면 수술해도 소용이 없다 하네요."
"딱 한 곳이 있기는 해요."
"그럼 좀 부탁드려요."

그래서 우리는 안면 몰수하고 119 구급차에 오른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야간에는 주로 인턴이 수술을 했지만 젊은 여의사가 꼼꼼하게 잘 수술해 주었다.
상처가 아물고 보니 얼굴에 없던 세로 주름이 미간에 생겼고, 코 부위는 다른 곳에서 살점을 떼어 채워 넣어서 수술을 했다는데 안경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살짝 걱정을 했다. 혹시 남편이 '이제부터 산 그만 가라고 하면 어쩌나?'하고. 그런데 울 남편은 "그만하기 다행이네." 그러고 만다.
나는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한 날을 또 새로운 기점으로 삼아야겠다 생각하며 블랙야크 100대 명산을 찍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지리산 천왕봉 등산은 한마디로 말해서 '길다. 힘들다. 멋지다. 해냈다'이다. 지금까지 산행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풍광을 마음껏 가슴에 품었다. 기쁨이 충만한 뿌듯한 산행이다. 그리고 특별한 대형사고를 경험한 날이기도 하다. 얼굴에 영광의 산행 흔적을 두 군데나 남겼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준 희망봉 대장님께 감사하다. 이제 완등을 하고 보니 100대 명산 찍어보라고 권면해 주신 것도 고맙기만 하다. 곧 만나서 맛난 거 한 번 사드려야겠다.

천왕봉 바로 아래 운무가 폴폴 날리며 하늘 궁전이 열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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