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르다가 제주 한라산 등반을 예약했다. 비행기 왕복으로 당일코스이다. 며칠 전에는 20일 한라산 날씨가 아주 좋을 것으로 예보되었는데, 오늘 보니 새벽에 눈비가 올 거란다. 아침 8시 전후로 산행을 시작해서 오후 5시에 끝나는 총 19km, 9시간 산행이다. 함께할 산우님들은 7명이다. 아주 오붓한 시간이 되겠다.
눈이 내려 새벽에 공항에 가는 게 좀 무리다 싶어 하루 전에 김포공항 근처로 가서 자고 낼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제주 한라산에서 겨울왕국 눈꽃을 맘껏 볼 수 있기를, 낮에는 날씨가 맑을 거라 하니 짙푸른 바다와 하늘도 기대를 해본다. 포근한 날씨에 눈꽃 산행은 그야말로 복된 산행이다.
참, 어쩌다 보니 내가 한라산 등반 일일 리딩 대장이 되었다. 좋은산에서 오늘(20일) 예약한 사람들이 25일 한라산에서 100대 명산 완등자가 있어서 대거 옮겨갔다고, 나보고 한라산 눈꽃 산행 리딩을 하란다. 뭐 인원 확인 체크 정도니까 그리 어려울 건 없겠다.
새벽에 이슬비가 살짝 내린 건지 한라산 상고대가 완전 환상이다. 성판악에서부터 뽀드득뽀드득 경쾌한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파란 하늘 위로 눈부시게 피어난 하얀 눈꽃을 보며 진달래대피소를 향해 걷는다. 낮 12까지는 그곳을 통과해야 한단다. 너무나 이쁘고 신비로운 눈꽃세상,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 지 춘추 잠바와 장갑을 끼어도 춥지 않고 포근하다. 영상 3-5도 딱 걷기 좋은 눈 산행이다. 기대한 것보다 200% 만족 산행이다. 이런 날씨에 이런 풍경을 보며 한라산을 걸을 수 있다니! 아,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다!
이번에 만난 한라산 상고대 눈꽃은 덕유산보다도 더 이쁘다. 덕유산이 애기 눈꽃이라면 한라산은 청년의 눈꽃이라고나 할까? 그것도 끝없이 이어지는 눈길이 눈꽃과 어우러져 신비 그 자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이 하늘인가 땅인가? 자꾸만 감탄사를 발하며 가슴이 벅차 발걸음을 멈추곤 한다.
성판악~사라오름~진달래대피소~백록담~삼각봉~관음사코스로 총 19km, 9시간 산행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진달래대피소에 좋은산님들 7명 모두 11시 30분 정도에 도착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봉긋한 분화구 백록담 봉우리가 아주 가까이 보인다.
진달래대피소에서 간식을 먹고 백록담 성판악코스 마지막 구간을 오른다. 2.6km. 1시간 30여 분 소요될 거란다. 계속 오름길이고 데크길도 많고 가파르다.
그런데 날씨가 좋아 조망이 탁 트인다. 구름과 제주 시내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100대 명산 72번째 인증을 한다. 인증숏 찍는 줄이 어찌나 긴지 그냥 옆에서 찍었다. 백록담 분화구가 눈에 덮여 있어서 이국적이다. 조금 추워서 도톰한 털모자와 털장갑을 꺼내서 낀다.
관음사 쪽 하산길이 성판악에서 오르는 길보다 조망이 더 좋다. 백록담 쪽 산의 뒷모습과 산 아래 펼쳐지는 운문가 절경이다.
하산길 상고대 눈꽃도 눈이 부시다. 눈꽃길을 걷노라니 시가 저절로 읊어진다.
상고대 눈꽃
-서주형
밤새 내린
이슬방울
순간의 꽃
서로
부둥켜 안고
피어나는 꽃
파란 하늘에
바치는
순애보
추운 겨울
시린 사랑
온 산을
하얗게
덮는다
눈꽃처럼만
분부시자
우리 사랑은
백록담에서 관음사 쪽으로 내려오는 초반 길과 점심 먹고 난 이후 길이 굉장히 가팔라서 로프를 잡고 뒷걸음으로 내려온다. 그 길은 아주 급경사 데크길이라는데 눈이 쌓여서 데크가 모두 눈에 파묻혔다. 어떤 여산우님 한분도 나처럼 조심조심 내려온다. 저 아래까지 쭉 절벽처럼 된 길을 내려가야 하는데 한참 동안 이어진다. 자세를 낮추어 허리를 구부리고 간신히 로프를 잡고 내려오다 보니까 허리가 다 아프다.
후에 하산해서 우리를 픽업해서 제주공항~ 한라산~한식당~제주공항 길을 책임지신 기사님께 들으니, 눈이 안 왔으면 관음사 코스 길이 훨씬 더 험하단다. 가파른 데크도 많고 바윗길도 많아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는 길이란다.
삼각봉에서부터는 핸드폰 배터리가 아웃이다. 지난밤에 잘 때 배터리가 80%만 충전되었더니 동영상 몇 개 찍고 보니 그런 것이다. 산행 인원수는 7명이라서 적지만 일일 산행대장을 맡았기에 마음이 급해서 빨리 내려가서 충전을 하려고 걸음을 서두른다. 나는 오름길에서는 느리지만 하산길은 좀 빠른 편이다.
관음사 4.5km 남겨두고 기사님께 문자 드리고 나니 핸드폰 배터리가 삐삐 소리를 내더니 아주 나가버린다. 약 1.5km 더 내려오니 화장실이 있고 전기코드가 있다. 거기서 약간 핸드폰 충전을 하면서 기다리니 우리 좋은산님들이 내려온다. 모두 다 만나서 기사님께 전화드리고 같이 내려온다.
정말 아쉬운 점은 하산길 끝이 다 와가면서 상고대 눈꽃 진짜 눈부시게 예쁜 겨울왕국 구간이 있었는데 그걸 담지 못한 것이다. 함께 한 산우님들이 사진을 찍었다니까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제주 한라산 눈꽃 산행은 함께 한 좋은산님들 모두가 100% 만족한 산행이었다. 나는 200% 만족이다. 제주 여행 한 달을 한다고 해도 이런 한라산 풍경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것이라 여긴다. 겨울이지만 날씨가 쾌청하고 포근하고,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그다지 미끄럽지 않고, 새벽에 약간의 이슬비가 내려 상고대 눈꽃이 활짝 핀 겨울왕국을 코스가 길어 하염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인원수가 적어 아주 오붓하게 산행할 수 있었다. 좋은산님들 7명 모두 안전하고 멋진 눈꽃 산행을 감사드린다.
참, 또 하나, 우리 집 옆동네에 사시는 좋은여님이 김포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와서 돌아오는 길에 집까지 태워다 주셔서 편안하게 귀가했다. 모든 것이 감사한 한라산 눈꽃 산행 길이길이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