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타다 보면 가을과 겨울과 봄을 함께 만날 때가 있다. 대체로 초봄에 산을 탈 때이다. 이제 막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아직 썩지 않은 마른 낙엽들이 땅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때 아닌 꽃샘추위와 잔설도 남아 있다. 이럴 때 산행을 하면 기분이 최고이다.
나는 대체로 바위산이나 험한 산보다는 비교적 완만한 육산을 더 좋아한다. 바스락바스락 발에 밟히며 나는 낙엽소리가 좋다. 일부러 낙엽을 풀풀 날리며 걸어보기도 한다. 등산화는 낙엽 가루 때문에 조금 더러워지지만 훌훌 떨어 버리고 낙엽 위에 쌓인 눈으로 문지르면 깨끗해진다.
이런 흙길 위에 낙엽 쌓인 길을 걷다 보면 어디론가 끝없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같다. 앙상한 가지들이 새 숨을 쉬고 초록을 피워내기 시작하는 때, 초록 사이로 낙엽 아래서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날 때, 가지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수줍게 벙글기 시작할 때, 숲은 아직 울창하지는 않지만 가장 새롭고 설렘을 가득 안겨준다. 한 송이 두 송이 군데군데 피어난 꽃을 만날 때마다 "와우! 예뻐 예뻐!"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다.
이 그림은 아마도 산행을 다시 시작하고 첫 산행을 한 이천 원적산이 아닌가 싶다. 원적산은 오르락내리락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하는 산행이다. 소담봉, 천덕봉, 원적봉, 높은 능선길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걷는 산행이기도 하다. 하나의 산봉우리를 지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나 다음 산봉우리를 향해 아래서 위로 올라갈 때, 한쪽은 응달이 지고 또 한쪽은 양달이 진 곳에 가을과 겨울과 봄의 공존 현상은 더욱 뚜렷하다.
해마다 피는 꽃이지만 이른 봄에 새롭게 만나는 꽃은 어쩜 그리 색이 고운지, 어쩜 그리 어여쁜지, 저절로 발길이 머문다. 꽃 앞에서 원 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눈과 마음에도 담는다. 행복한 산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