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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Sep 07. 2023

가장 위대한 일 자손을 낳는 일

영화 <붉은 수수밭>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장예모 감독의《붉은 수수밭》은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의 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영화는 초반에 나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이야기를 회고한다. 아버지에게 들은 것인지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인지는 모른다. 나는 원작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고 영화는 두 번째 보는 것이다.


나의 할머니 여주인공 추알은 꽃다운 나이 18세에 십팔리 문둥병에 걸린 리서방에게 나귀 한 마리에 팔려 시집을 가게 된다. 리서방은 고량주 양조장을 하는 부자이지만  나이가 50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가고 독신으로 살고 있다.


리서방은 가마꾼들을 보내 추알을 가마에 태우고 온다. 가마꾼 중 한 명은 불러온 사람 유이찬아오이다. 추알은 가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유이찬아오의 근육질 등을 보며 호기심을 느낀다. 유이찬아오 역시 가마 밖으노 삐져나온 추알의 꽃신을 보며 관심을 갖는다. 가는 길에는 청사다리가 있는데 자생하는 수수밭이 드넓게 펼쳐져 바람에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다.


가는 도중 복면을 한 도둑이 총을 들고 나타나 가마꾼들의 돈과 허리띠를 뺏는데, 유이찬아오가 갑자기 덮쳐서 죽여버린다.  


유이찬아오는 추알을 들어 안고 수수밭 속으로 들어가 수숫대를 밟아 자리를 만들고 추알을 눕히고 인연을 맺는다.


그 사이 십팔리 양조장 주인 문둥이 리서방이 살해된다. 추알은 양조장의 여주인이 된다. 9월 9일에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며 일꾼들에게 '아홉째'라고 부르라고 한다.


유이찬아오는 일꾼들이 만들어놓은 술에 오줌을 누어 더 독하게 만든다. 일꾼들 중 대표가 되는 이가 지금까지 만들어본 술 중 단연 최고라며 '십팔리주'라 부른다.


수수밭에서 맺어진 아이가 태어난다. 그가 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발가벗고 항아리를 건너 다니며 논다. 일하는 부모는 빙그레 웃어준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 막바지로 가면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 수수밭을 없애고 침략을 위한 철도를 놓는다. 항일운동을 는 중국 사람들을 잡아서 짐승의 포를 뜨듯이 살가죽을 벗긴다. 국인들은 술로 폭탄을 만들어 일본 군인들을 공격한다. 붉은 수수밭이 붉게 타오른다. 추알을 포함해서 모두가 다 죽지만, 나에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두 부자가 그 위에 우뚝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내 인생영화로 삼았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아무래도 제목을 잘못 알은 것 같다. 영화 안에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 안 나온다. 내 인생영화에는 색색의 천을 염색해서 하늘하늘 마당에 말리는 장면이 환상적으로 나오는데 말이다.(다시 찾아봐야겠다.)


《붉은 수수밭》은 오늘날로 치면 문제가 좀  있는 영화일 수가 있겠다. 나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성폭행한 셈이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이다. 또 할아버지는 술에 오줌을 누어서 식품위생법에 걸리는 짓을 한다. 딱 경찰서에 잡혀갈 중대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영화니까 감안하고 봐줄 수가 있다. 오래된 영화니까. 그 시절에는 이런 것들도 대체로 용납되는 시대였으니까.


나는 이 영화에서 추알의 삶에 공감한다. 가난해서 부모는 나귀 한 마리에 딸을 팔아버리지만, 그로 인해 추알은 가난에서 벗어난다. 문둥이 신랑이 될 뻔한 리서방이 살해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그와 살지 않아도 되고 문둥병에 걸릴 위험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젊은 남녀가 눈이 맞는 것은 그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집가는 가마에서도, 그 가마를 끄는 가마꾼 입장에서도 말이다. 남녀가 눈이 맞는 것은 한계가 없다. 그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욕정일까? 둘이서 함께 원하면 사랑이고, 한쪽만 원하면 성추행 내지는 성폭행이다.


추알과 유이찬아오의 수수밭 인연은 사랑이라 볼 수가 있겠다. 추알이 전혀 반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원해서 맺어진다. 그리고 그 씨앗이 아버지에게로, 나에게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은? 그렇다. 우연인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눈이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이 붙어 자손을 낳고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역경과 위험과 고난이 있다. 전쟁도 그중 하나일 수 있다. 그래도 죽을 사람은 죽고 살아남을 사람은 산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통과하며 자손을 퍼뜨려 대를 이어간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자손을 낳는 일, 그것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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