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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May 13. 2024

아버지의 미소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활짝 웃는 우리 아버지의 미소이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다. 아버지는 평생 일하지 않고, 돈도 벌지 않고 한량처럼 살다 간 사람이다. 그저 살기만 했다면 문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술과 도박을 좋아했다.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거기다가 동네 사람들과 화투를 쳐서 꽤 많은 돈을 잃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싸웠다. 한 번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돈을 안 내놓으면 집에 불을 질러버린다면서 광에 있는 석유통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기도 했다. 당시 생활고 때문에 읍내에서 마른 건어물을 떼어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팔던 어머니는 절대로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얻어맞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1년 동안 소식 두절이었다. 3살짜리 젖먹이 남동생이 있는 데도 매정하게 떼어놓고 집을 등진 것이다.     

 

1년 후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찾으면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신림동 비구니들이 사는 절에서 보살로 밥을 해주면서 지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다시는 술과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어머니와 재회했지만, 그것을 끊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술에 취한 아버지가 고꾸라져 있는 것을 보면 그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아버지는 항상 나보고 공부 좀 그만하고 돈을 벌어서 용돈을 가져와야 다방에 가서 차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사 먹을 것이 아니냐며 나를 괴롭혔다.    

 

그런 아버지는 환갑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지병이 있었던 아버지는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집에 가서 죽겠다며 퇴원을 한 상태였다. 그날 나는 어쩐 일인지 갑자기 친정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저녁 무렵에 찾아갔다. 당시 나는 친정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택시로 20여 분이면 친정에 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을 혼자서 지킬 수 있었다.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훨훨 날아가셔요. 예수님 믿고 그동안 잘못한 거 다 얘기하셔요. 예수님 이름으로 죄를 없애 달라고 고백하셔요.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 훌훌 다 털어버리셔요. 이제 가장 좋은 모습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거예요."   


나는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드렸다. 아버지는 2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다. 기도가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지만,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아버지는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양 입꼬리를 올리고 활짝 웃으시고는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분명 하늘나라에 입성해서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술과 도박에 절어 산 아버지를 원망한 날도 많았지만, 그때 아주 깊이 사랑해드렸다면, 아버지가 좋은 모습으로 바뀌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한 발 었지만, 이제 하늘나라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나면, 진심으로 사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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