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순오 Aug 12. 2024

트럭을 태워줘서 고마워요

  B기사님,

  2m 가까이 커다란 키에 눈이 가느다랗고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얼굴내가 출근하면 비스킷과 함께 커피를 타다 주었죠.

   "미스 서, 아침 안 먹었죠?"

  실은 내가 경리 일을 보고 있는 거니까 커피를 타다 주면 더 좋았겠지만 B기사님이  선수를 쳤어요.

  "고마워요."

  나는 또 이렇게 말해야 하는 데도 그냥 싱긋 웃기만 했어요.

아마도 B기사님은 내 미소가 보고 싶어서 매일 아침 커피를 타다 주었는 지도 몰라요. 나는 그때 20대 초반의 나이였으니까 30대를 훌쩍 넘긴 B기 눈에는 예쁘고 싱그러웠을 수도 있어요.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두 번 실패한 후 더 이상 공부한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버지가 소개하는 곳에 취직을 했거든요.


  여고 졸업하던 해에는 수능시험(이 표현이 맞는다면)만 치어요. 집에서 돈 없다고 대학을 못 가게 하니까 점수에 따라서 가고 싶은 대학에 원서 내는 건 아예 못 해봤고요. 그다음 해에 혼자서 재수할 때는  대학에 떨어지고   대학 국문과에 붙었는데 집에서 안 보내줬고요. 삼수를 할 때는  어려운 종로학원 시험에 붙었는데 갈 수가 없다고 하니까 친구가 학원비를 대주어서 3개월 다어요. 그리독학해서 Y대와 K대에 원서를 냈어요. 점수가 커트라인보다는 적당하게 높았기에 합격하려니 했. 집에서도 그 정도 대학이면 명문대학이니까 붙으면 보내줄 수 있겠다 싶고요.

 

  그런데 그해에는 글쎄, 입시 제도가 갑자기 바뀌면수험생 한 사이 10여 군데 대학에 서를 을 수가 있었어요. 원서대도 꽤 비쌌기 때문에 집안이 괜찮은 친구들은 거의 10군데 대학에 원서를 썼어요. 는 2개 대학에 원서를 썼는데, Y대학에는 교육학과, K대학에는 법학과를 지원했어요. 물론 1 지망, 2 지망, 3 지망이 있었고요. 그런데 는 집에서 가까운 K대에 면접을 가지 않고, 기독교학교인 Y대에 면접을 갔어요. 아버지 고향 친구분이 K대 행정실에 있어서 와서 면접만 보면 장학금도 주겠다고 했다는 데요. 가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거지요. 사실 법학과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Y대와 K대 두 곳에 지원한 수업생들이 대부분 Y대에 와서 면접을 치르고, K대에는 가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 Y 대는 경쟁률이 아주  높았고, K 대는 많은 학과가 미달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Y대에 면접을 보러 간 안타깝게도 낙방했고, 부모님이 이제 더 이상 대학 꿈도 꾸지 말라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아버지 고향 사람이 서울에 와서 성공을 해서 돈을 꽤 많이 벌었는데, 여기저기 맥주 대리점을 냈다. 용산에 있는 대리점이 가장 잘 되는 곳인데 그곳에 경리 자리를 겠다 하는데 가서 일하다가  적당한 사람 만나서 시집이나 가거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너무 억울해서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했어요. 눈이 퉁퉁 붓고 코가 막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꽉 잠겼었지요. 정말이지 죽고만 싶었어요. 실력대로라면 두 대학 다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는 요. 한쪽으로 밀리는 바람에 낙방을 한 것이라서요. 나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은 종로학원 출신 들도 K대학으로 원서를 넣고 면접을 간 들은 모두 합격을 했으니까요. 부모님 말씀 안 들은 걸 처음으로 후회해 보았네요.


  설상가상으로 우리 엄마가 막무가내로 나를 데리고 미아리고개 점집까지 찾아갔어요.

  "글쎄, 네 팔자에 대학 갈 운이 있나 보자."

  점집 밀집지역 안으로 골목으로 골목으로 들어가서 어느 점집으로 가서 물어보니 내가 절대로 대학 갈 운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더군다나  때문에 남자들이 칼부림이 날 수도 있다면서 남녀공학은 절대 안 되고 가려면 여대를 가라는 것이었어요.

  "그것 봐라. 운이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점쟁이를 철썩 같이 믿는 우리 엄마는 절대 다시는 대학시험을 쳐서는 안 된다했어요.


  혼자서 삭히다가 결국 대학을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죠. 그동안 공부하던 책을 다 내다 버리고 맥주대리점에 경리로 취직했어요. 늘 숏커트 하던 머리도 길어서 파마를 하고 화장도 하고 뾰족구두와 옷도 사 입었어요. 몸에 액세서리도 달구요.


  대학 가기를 포기하니까 그런대로 지낼만했어요. 맥주 대리 경리라고 해봐야 하는 일이 뻔했으니까요. 맥주 몇 짝이 들어오고 몇 짝이 나갔는가만 체크해서 일일 집계를 하고 월말에 총집계를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점심에는 기사님들과 함께 식당에 가거나 음식을 시켜 먹고 돈을 지불하면 되었고요. 기사님들이 따로 사 먹고 영수증 첨부하면 돈을 주고 기록을 하면 되었어요.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B기사님인데, 여러 기사님들의 총괄을 맡고 있었지요.


  B기사님이 에게 잘해 주니까 다른 기사님들도 당연히 잘해주었지요. 하긴 사장님 지연이라 그 백으로 들어갔는데, 나한테 잘 안 해주면 어쩌겠어요? 암튼 는 사장님과 기사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참 쉬운 일을 했었네요. 사무실 청소도 가 안 하고 기사님이 다 해주었으니까요. 고졸 출신 치고는 월급도 꽤 괜찮게 받았고요.


  하나가 더 생각나네요. 가 그 당시에 재수를 많이 했고 또 Y대에 원서를 넣어서 떨어졌다고, 그 실력은 인정한다면서 사장님이 중학교 1학년 아들 과외를 맡기셨어요. 제기동에 단독주택이 있었는데, 하루 일이 끝나면 거기까지 사장님 차로 를 태우고 가서 과외를 하도록 했어요. 2시간 과외가 끝나면 저녁식사도 융숭하게 대접을 받고 수유리에 있는 우리 에 버스를 타고 왔지요. 당시 사장님 아들 전과목 과외비가 경리일 해서 받는 월급보다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계속 그렇게 투잡으로 일을 했더라면 대리점이나 학원 하나쯤은 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네요.


  "B기사님, B기사님, 트럭 좀 태워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해 가을 대학입시 원서를 낼 때가 돌아오자 돌연 는 그냥 대입 시험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공부는 하나도 안 했지만 그렇게 말기에는 너무 아까웠던 것이지요. 성적이 어느 정도 나와 준다면 일은 하나만 하고, 주간대학이 안 되면 야간대학이라도 갈 생각이었어요. 그때는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모아둔 돈도 조금 있었고요.


  B사님은 흔쾌히 나를 트럭에 태우고 속성 사진관으로, 문방구로, 학교로 달려가 주었어요. 는 그날 단번에 대입원서를 써서 제출했지요. 그리고 시험날짜가 다가오자 하루 휴가를 내고 시험을 보았어요. 그날도 끝나고 를 태우러 와서 맛있는 짜장면을 사주셨지요. 우리가 처음으로 데이트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네요. B기사님은 키가 너무 커서 내가 옆에 서서 걸으면 손도 잡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B기사님 어깨에 키가 닿았으니까 손은 한참 아래에 있어서 팔을 구부려야 잡을 수 있었어요.


  신기하게도 그때 친 시험으로 는 E여대에 붙었어요. 집에서는 가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명문여대에 붙었으니 가 천재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대리점에서 썩히너무 아깝다는 것이 우리 집에서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이유였어요.

  "첫 번째니까 주지만 그다음은 혼자서 알아서 해!"

  부모님은 냉정했어요.

  저는 끊임없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대학 학업을 겨우 마칠 수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까 손 편지 얘기를 한다면서  얘기만 했네요. 단 한 번을 써도 손 편지는 손 편지인 거죠. B기사님에게는 딱 한 번 손 편지를 썼네요. 가 대학에 합격하고 맥주 대리점을 그만둔다고 인사를 하러 갔을 때요.  딴에는 꽤 비싼 화장품을 사가지고 그 안에 고마움을 담은 손 편지를 써서 넣었어요. 예쁘게 포장도 했지요. B기사님에게 그걸 드리고 내가 빙그레 웃으니까 B기사님도 따라 웃었어요.

  "미스 서! 축하해요. 멋진 대학생이 되길 바요."

  그리고 우린 헤어졌어요. 그 후 다시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에게 듣자 하니까 제가 경리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주 대리점 사장님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도 회갑도 못 쇠고 돌아가셨어요. 그 후 맥주 대리점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어요.


  B기사님,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사시나요? 결혼은 하셨나요? 자녀들은요? 애들도 키가 큰 가요? 궁금한 게 많네요. 때 일은 두고두고 감사해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이지요.  B기사님은 나에게 숨은 은인 같은 분이죠. 부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음 좋겠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