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씨,
우리를 누가 소개해 주었을까요? 그게 참 아득해요. 그렇지만 기억을 추적해 보면 아마도 대학시절, 문학 동아리 후배가 연결해 준 듯해요. 나는 대학시절에 아르바이트하느라 무지 바빴는데도 대학 연합 동아리를 두 개나 했었거든요. 하나는 경영학과 연합 동아리였고, 하나는 문학 연합 동아리였어요. 우리를 소개해준 그 친구는 K대 법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누나가 S대 미대생이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소개팅도 많았고 반팅에 과팅에 미팅이 참 많은 시절이었던 듯해요. 나는 바쁘다 보니까 미팅을 거의 안 한 축에 속했는데, 처음으로 개인 소개팅을 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D 씨였어요.
나는 사실 우리 아버지가 하도 S대 타령을 해서 D 씨를 만나면서부터는 S대 캠퍼스를 내 학교 들락거리듯이 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D 씨는 낙성대역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데이트를 할 때 S대 뒷길로 들어가서 미대에서 D 씨가 조각 작업하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요. 나는 글을 썼고 그림이나 조각 같은 건 배워본 적도 없지만 예술하는 사람이 그저 좋았어요. D 씨의 졸업전에도 갔었던 것 같네요. 그때 찍어온 D 씨의 조각작품들이 지금도 내 앨범 속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어요. 가끔 꺼내서 들여다보며 그 시절을 추억해 보지요.
D 씨가 내 조각상을 만들었다면서 하숙집에 세워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전신 나체상이었는데, 모델을 보고 짐작해서 만들었다고 했어요. 얼굴만 내 얼굴이라고 했죠. 나는 내 얼굴이 굉장히 낯설더라고요. 우리는 항상 거울 속에서 앞면만 보고 옆모습은 제대로 안 보고 살기 때문이죠. 반쯤 앉은 자세로 손을 턱에 괴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조각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올라요. D 씨가 그때 그 작품을 내게 준다고 했더라도 가져올 방법이 없었을 거예요.
청동조각품이었으니까요.
참, 우리가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던 것 같은 데요. 어쩌다 우리가 흐지부지 되었는지 그것도 잘 생각이 안 나네요. D 씨는 집안이 그래도 꽤 괜찮았어요. 형님이 둘 있었는데, 큰 형님 부부가 교육자였고요. 외국에 살면서 D 씨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던 작은 형님도 부유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늘 고마운 분이라고 얘기했으니까요.
부산인가 대구인가 D씨의 큰 형님 집에도 한 번 놀러 갔었네요. 우리가 사귀고는 있었지만 절대 한 방은 못 쓴다고 해서 나는 형수님이랑 자고 왔었네요. 그때는 그랬네요. 연애를 해도 남녀가 같이 한 방을 쓰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시대를 살았네요. 그러니 얼마나 헤어지기가 쉬워요.
D 씨가 우리 집에 한 번 인사 차 와보고는 우리 사이가 소원해졌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못한 건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죠? 아님 우리 아버지가 술꾼이어서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졸업반인 D 씨가 결혼을 생각하면서 우리 집에 와 보았는데,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까 내가 바람맞은 거네요. 결혼상대자로 인기 1순위였던 E여대생이 집안 형편 때문에요.
그렇지만 나는 신경 안 썼어요. 상처를 받지도 않았고요. 그냥 나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D 씨를 사귀었기에 그 덕분에 S대를 마음껏 가 보고 누릴 수 있었던 걸로 충분했어요. 학식도 먹어보고 도서관에도 가보고 교내 구석구석을 다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요. 미술이라는, 조각이라는 예술의 세계에 듬뿍 잠기었다 나올 수 있었기에 그저 감사했지요.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고 까마득히 D 씨를 잊었었네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궁금해서 인물 검색을 해보았어요 그랬더니 꽤나 유명인이 되었더만요. 돈도 많이 벌었나 봐요. 큰 프로젝트를 몇 개씩 했으니까요. D 씨가 실력 있는 조각가라서 그랬을 거예요. 거기다가 아내 쪽 집안이 좋았는 지도 몰라요. 암튼 멀리서 지켜보는 내 마음이 흐뭇했어요.
아마도 나랑 결혼했으면 생계를 유지하느라 학원이나 과외로 학생들 입시나 지도했을지도 몰라요. 조각상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우리가 헤어진 건 참 잘한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궁금해요. 혹시나 내 조각상을 D 씨 집안 어디엔가 서재에나 작업실에나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을 해보는 거지요. 내가 D 씨의 조각 작품 사진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우리가 사귀는 동안은 참 즐거웠거든요. 나한테는 내 조각상을 만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게 너를 만든 거야'라고 했으니까요.
D 씨는 나보다 시도 더 잘 썼어요. 언젠가 D 씨가 일기장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 안에는 일기가 모두 시였어요.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애에 대한 시도 있었고, 나에 대한 시도 있었지요. 내용은 기억하지 못해요. 그냥 한 번 쓱 읽고 덮어버린 것이라서요.
나는 D 씨에게 손 편지도 썼었네요. 그런데 답장은 한 번도 안 보내주었어요. 내가 손 편지를 보내면 우리는 곧 만나게 되었고, 낙성대 뒷길을 걸어 S대에 가서 데이트를 했고, 학식을 먹었네요. S대 주변으로는 식당을 찾아가려면 엄청 걸어서 나가야 해서 엄두를 못 냈어요. 그런데 그 학식의 추억이 새록새록 아름답네요.
나는 D 씨에게 보내는 손 편지에 무어라고 썼을까요? 어렴풋이 D 씨의 조각품들에 대해 썼던 것 같아요. 부드럽고 감미롭고 그러나 강렬하고 독창적인 작품들에 대해서 썼을 거예요. 훌륭한 조각가가 될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을 거고요. 그러고 보면 내가 보낸 손 편지의 축복이 한몫 한 거네요. '우리가 한 말과 글은 그 자체로서 자기 사명을 다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글을 쓰면 성공한다는 것이고요.
참 다행이에요. 그때는 D 씨가 키만 훤칠하게 크고 몸이 무척 말랐었는데, 그래서 작품 하나 하고 나면 며칠은 꼼짝도 못 했었는 데요. 여러 개의 대작을 한 걸 보면 많이 건강해졌나 봐요. 기회가 되면 나의 조각상을 찾아보듯이 D 씨의 작품들을 보러 새로운 여행을 나서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