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씨,
그동안도 소설 열심히 쓰고 있죠? 온라인 서점에서 보니까 최근에 소설집도 냈더라고요. 구입해서 읽어보니 J 씨 성향에 잘 맞는 다정다감한 소설이더군요.
"아하!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부드러운 남자가 되었나 보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읽었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J 씨였네요. J 씨는 우리 과의 조교를 맡고 있었지요. 학과 사무실이 다른 예술대학원 사무실이랑 같이 쓰는 통합형이었는데 우리가 공부하는 건물 맨 꼭대기층에 있었어요. 사무실에 볼 일이 있을 때는 마치 높은 집의 옥상을 올라가듯이 계단을 몇 개나 올라갔는지 몰라요. 오르고 또 오르고 다리가 팍팍해질 정도였지요.
그렇지만 풍경은 아주 근사했어요. 거기서 통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학교 연못이 보이고 주변으로 서있는 나무와 꽃과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왔어요. 저는 그 풍경이 보고 싶어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사무실에 올라가 보곤 했어요. 사무실은 늘 열려 있었고, 어떤 때는 J 씨가 없고 다른 과 조교가 있기도 했고, 가끔은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지요. 저는 조용히 풍경만 감상하고 내려왔어요.
J 씨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요. 저는 수유리에서 다녔으니까 학교가 꽤나 멀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하니 참 부러웠어요. 물론 이야기만 들은 것이라 어떤 자취방인지도 궁금했어요. 학교 뒤쪽으로 약간 산 쪽에 언덕이 진 곳에 있다고 했지요.
당시 우리 과 사람들은 대학원 합격자가 한 해에 전공별로 한두 명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원생 석ᆞ박사 과정 전체를 다 합쳐도 한 20여 명이나 되었을까 싶네요. 우리는 수업도 함께 들은 적이 많아요. 수업을 마치면 같이 저녁을 먹고 또 2차, 3차 애프터를 가서 술을 마셨지요. 끝없는 문학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요. 그러다 결국에는 다들 취해서 집에 못 들어가는 친구들은 J 씨 자취방에서 자기도 했었다지요. 여자들은 택시를 타고라도 어떻게든 집에 들어갔지만요.
제가 문창과에 들어간 해에 함께 합격하신 나이 드신 남자분 생각이 나네요. 그분은 이미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도 냈던 분인데 한자 이름에 구름과 낙엽이 있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좋은 직장에도 다니고 있어서 가난한 우리들 밥값이며 술값도 거의 도맡다시피 해서 내주셨는 데요. 어느 날 술자리를 몇 차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총알택시를 탔는데 사고가 났다지 뭐예요?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는 분이 되었지요.
저는 그때 휴학을 하고 결혼을 해서 첫째와 둘째 아이를 낳은 상태라 그분의 소식을 듣지도 못했고 가보지도 못했네요. 아마도 J 씨가 조교니까 연락책이었는데, 제가 무지 바쁠 거라 생각하고, 또 안 좋은 소식이라 일부러 알리지 않은 듯해요. 제가 복학을 해서 그분 얼굴이 안 보이기에 물었더니 그제야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지요.
"사람이 이름을 잘 지어야 해."
"그러게요. 구름과 낙엽처럼 자유롭고 싶었나 보네요. 일찍 간 걸 보니까요."
우리는 술자리에서 한 마디씩 했어요. 그 후로는 그분이 없으니까 밥값이며 술값은 다 같이 더치페이를 했고요.
J 씨,
우리 과에는 현대시, 현대소설, 고전 전공이 있었는데, 저는 현대시, J 씨는 현대소설 전공으로 들어왔었지요. 제가 들어가기 전이었을까요? 아님 후였을까요? J 씨는 그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했어요. 무슨 문학상도 받아서 소설집도 냈지요. 함께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책에 사인을 해서 선물로 주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 책을 가지고 있어요.
J 씨,
기억나는 것은 문학보다도 바바리코트가 참 잘 어울렸던 J 씨의 모습이네요. 카키색에 가까운 조금 짙은 비둘기색이었는데,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허리 벨트를 맸지요. 그래도 바바리 자락이 바람에 자연스럽게 흩날리는 모습은 어느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분위기였어요.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테리우스를 닮았을까요? J 씨 머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딱 그랬어요. 여자들은 대체로 분위기에 약하잖아요? 저는 마음속으로 '내가 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J 씨를 사귀어 보는 건데' 그러면서 살짝 흠모의 마음을 가졌어요.
저는 그때 일기장에 J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몇 장 썼어요. 지금은 그 일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요. 보내지 못한 손 편지가 되었네요. 거기에도 바바리코트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것 같아요. J 씨의 바바리코트 옷소매를 가만히 잡고 둘이서 나란히 걸어보고 싶다고요.
J 씨는 상 복이 많은 것 같아요. 몇 년 전에도 유명한 문학상을 또 받았으니까요. 아니 실력이 있는 거겠지요.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소설 강의를 하고 있다지요?
저는 가끔 J 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냥 보고 싶어요. 단풍 고운 가을이 좋을까요? 하얀 눈 소복이 내리는 겨울이 좋을까요?
"지금도 바바리코트를 입을까? 나를 만나러 온다면 그때 입었던 것과 비슷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올까?"
기대를 해보면서요.
물론 만나는 일은 아주 쉬워요. J 씨가 진행하는 문학행사 같은 데 제가 신청을 해서 가면 되니까요. J 씨는 깜짝 놀라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공적인 장소에서 말고, 그냥 따로 아주 사적인 장소에서 만나고 싶어요.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옛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 좋겠어요.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놓고요. 그러면 우리가 다시 만남의 물꼬를 튼 후에 제가 쓴 글도 메일로 보내드리고 한 번 읽어봐 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데요. J 씨는 소설을 잘 쓰니까 꼼꼼하게 잘 봐줄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글 친구가 되면 참 좋겠다 생각을 해봐요.
그렇지만 저는 그저 조용히 지내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어디 문학행사 같은 데 쫓아다니는 건 잘 안 해요. 산행이나 여행이라면 몰라도요. 문학행사에 가서 다수의 아는 얼굴을 만나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는 거죠. 제가 그래도 문학을 꿈꿔온 세월이 오래인지라 여기저기 문학 관련 지인들이 참 많거든요. 지금은 그림도 그리고 있어서 미술가들도 꽤 알고요. 더군다나 저는 지금은 술을 못해서 그분들과 긴 시간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어려울 수 있어요. 술은 잔을 부딪쳐야 맛이라는데 저는 그게 안 되거든요. 그러니 우리도 그저 객관적인 관계가 좋을 수도 있겠네요.
J 씨, 그럼 잘 지내요. J 씨가 소설집 내면 또 사볼게요. 참, 저도 첫 번째 그림책 냈어요. 제목은 <탄생>인데, 우리 외손녀를 기다리면서 그 설렘과 축복을 담아 썼지요. 예쁜 외손녀는 그새 태어나서 백일을 지났네요. 궁금하면 J 씨도 제 그림책 사서 보셔요.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