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서 내 자축 시를 낭송해 준 시인 C에게
커다란 눈에 눈썹이 짙고 콧날이 오뚝하고 입술도 도톰하고 목소리에는 전라도 특유의 평평한 사투리가 정겨운 후배 C에게
이렇게나 길게 C를 불러보는 것은 고향 사람이라고 나를 잘 따랐기 때문이야. 전남이라는 지역은 같았지만 우리 고향과 C의 고향은 군소재지가 달랐으니까 엄밀히 따진다면 우리가 아주 가까운 동향 사람은 아닌 거지. 그래도 문창과에서 만난 C는 그 누구보다도 무척 반가웠어. 나보다 한 해 늦게 들어왔으니까 후배가 맞는 거고. C는 꼭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기에 친동생처럼 더욱 정다웠지.
C는 그때 광주에서 법학과를 마치고 우리 대학원 문창과에 들어왔지. 나도 학부에서는 경영학을 했기에 C가 법학과 출신이라 의외라 생각했지.
"법대면 사법시험 쳐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누님은 경영학이니 공인회계사 시험 쳐야죠!"
"그게 그런가?"
우리는 농담을 했지. 그렇지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학과가 바로 법학과와 경영학과야.
C는 자취를 하면서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학교에 다녔어. 나는 수유리가 집이라서 버스로 통학을 했지. 나는 조금 쪼들렸지만 결혼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냥 공부만 했어. 그 당시에는 '대학생 과외금지법'이란 게 있어서 과외 아르바이트도 못 했지. 하여간에 그때는 대학 복수지원에다 과외아르바이트 금지법 등 희한한 법이 새로 만들어져서 가난한 우리가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을 주었어. 우리가 마땅한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만 하나씩 구했어도 대학원 졸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결혼할 때 나는 자축 시를 한 편 썼어. <하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시였지. 그리고는 C에게 내 결혼식장에서 닝독해줄 것을 부탁했지. C는 흔쾌히 허락했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주었지. 나는 축가 한 곡과 내 자축 시를 결혼식 순서에 넣었었지. 세종대왕기념관에서 한 멋진 결혼식이었어. C의 낭송 덕분에 결혼식장이 더 빛이 났지.
그리고 우리는 집들이 같은 걸 했고, 나는 휴학을 했기에 학교에 한동안 못 나갔어. 그러는 동안 C는 석사과정 졸업을 했고 박사과정도 들어갔고 시집도 냈고 결혼도 했어. 다 전해 들은 소식이야. 나는 시를 잊고 애 둘을 낳아서 키우느라 바빴거든.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어. 지금으로부터 한 십여 년 되었을까? 어느 날 신문을 읽고 있는데 C의 소식이 사진과 함께 실렸어. 눈이 번쩍 뜨였지. C가 출가를 한다는 기사였어.
"가족은 어떻게 하고?"
나는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바로 인터넷 검색창에 C 이름을 넣어봤지.
'출가를 한다는 것은 세속의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고, 온라인 상에 올라와 있는 C의 시들을 읽어보면서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었지.
'가난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가슴이 많이 아팠어. C는 시집도 여러 권 냈고 큰 문학상도 받았는데, 시인으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일은 그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구나 싶었지.
나는 바로 C에게 손 편지를 썼어. 주소는 알 수 있었지. C가 출가해서 들어간 곳이 아주 유명한 사찰이었기 때문이야. 그곳에서 얼마 동안 정식 스님이 되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 같았어. 나는 그곳으로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어. 무어라고 썼을까? 미안하다고,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한 번도 연락을 못 해봐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런 내용이었지.
"이미 출가를 결정한 C에게 그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또 생각했지. 속세에서의 인연은 그것으로 이미 끝난 거라고. 가족과의 인연도 끊을 수 있는 사람에게 스쳐 지나간 나와의 인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지만 나는 도서관에 가서 C가 쓴 시집을 거의 다 빌려서 읽어 보았어.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시들이었어. 기독교인인 내가 구입해서 가지고 있기에는 좀 부담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지. 세속의 아픔과 고통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어.
'지금도 계속 시를 쓰고 있을까?'
몇 년이 지나고 최근에 또 이름을 쓰고 도서 검색을 해보았지. 사람들과 분리된 세계에 있어도 좋은 시를 쓰는 이해인 수녀님처럼 C도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시를 쓰고 있을까 기대를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C가 어느 사찰의 주지스님이 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뜨더라고. C의 이름도 'OO스님'으로 바뀌어 있었어.
"축하해주어야 할까?"
몇 년 전에 우리 문창과에서 공부하고도 몽골 평신도선교사로 나가서 국제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T가 한국에 들어왔기에 종로에서 만났어. 같이 낙산공원을 걷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지. 그때 T한테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는 우리 과 출신 사람들 소식을 듣고, C 얘기도 했어.
"우리가 둘 다 기독교인인데도 한 번도 C에게 교회 가자는 말을 못 해 봤네요."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우리가 각자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니까."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 태어나고 죽는 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다른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 학교도 종교도 결혼도 말이야. 더 중요한 일들도 가능해. C처럼 속세를 끊고 출가를 하는 일도 말이야.
시인 C,
너에게는 이제 사람들 대신 산에 있는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물소리가 동무를 해주겠네.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이고,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면서 자연의 신비를 온몸으로 체득하겠네. 그 순간순간들이 영롱한 시가 되어 태어날까?
언젠가 더 나이가 들면 그때 우리 함께 공부했던 이들끼리 연락해서 C가 있는 곳을 한번 방문해 보는 건 어떨까 싶어. C에게는 그냥 연락 없이 불쑥 말이야. 차라도 식사라도 가능하다면 먹고 와도 괜찮고, 그게 어렵다면 먼 발치에서 C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런 날이 한 번은 오면 좋겠어. 그러면 나는 내 결혼식에서 자축 시를 낭송해 준 C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꼭 손 편지를 써서 건네주려고 해. 그게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한 편의 좋은 시였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