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by 서순오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이혼하지 않고 살아주신 것이 참 고맙기만 하다. 엄마의 지론은 딱 한 가지였다. 자식들에게 깨끗한 호적을 물려주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18살에 시집을 와서 19살에 나를 낳았다. 키가 작고 당찬 우리 엄마는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우리 아빠와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무엇을 보고 결혼을 했을까? 아직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에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엄마가 아빠의 외모를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아빠는 외모가 탤런트 박근형을 닮았다. 잘 차려입고 외출을 하면 사람들은 아빠보고 '새 장가 가도 되겠네' 그런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생기고 건장한 우리 아빠는 평생 일도 안 하고 술과 노름을 하며 살다 회갑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돌아보니 우리 엄마처럼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엄마는 시골에 살 때 아빠가 해야 할 농사일도 도맡아서 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도 했고, 서울로 이사 와서는 혼자서 순댓국 식당을 했다.


아빠는 시골에 살 때 술과 노름에 절어 살았다. 엄마가 벌어온 돈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서 노름하다 다 잃고 말았다. 급기야 엄마는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갔고 서울 신림동에 비구니승들이 사는 절에서 보살로 1년을 지냈다. 말이 보살이지 밥을 해주는 것이라 절에서 식모살이를 한 것이다.


엄마를 찾으면서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빠는 다시는 술과 노름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끊지 못했다. 서울로 이사 와서도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복덕방에 가서 노름을 했다. 가게에 있을 때는 알코올중독상태로 하루 종일 잔소리를 했고, 자주 소줏병을 던져 유리창을 깼고, 엄마를 때려서 얼굴에 멍이 들게도 했다. 가족들이 한 상에서 밥을 먹다가도 뭐가 안 맞으면 밥상을 뒤엎어 버렸다. 아빠와 함께 편안하게 밥을 먹은 적이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아빠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살았다. 3녀 2남을 낳아 혼자 힘으로 키우고 공부시켰다. 큰 딸인 내 밑으로 여동생 둘, 남동생 둘이 있다. 엄마가 이혼하지 않고 살아주셔서 우리 형제자매들도 삐뚤어지지 않고 모두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한여름엔 시원한 모시옷을, 한겨울엔 도톰한 누비한복을, 광장시장에서 천을 떠다 손수 지어 입히셨다.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짓고 반찬을 새로 만들어 상을 차려주셨다. 아빠가 노인정에 놀러 가시면 노인정 사람들 점심식사까지 모두 지어서 가져다주곤 하셨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이나 주말이면 행상을 하는 엄마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다닌 적이 있다. 하루 종일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 걸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미역, 멸치, 마른오징어, 문어, 새우, 황태 같은 건어물들이었다. 물건 판 값은 대체로 곡식으로 받았는데, 콩, 팥, 찹쌀, 깨 같은 것들이어서 돌아올 때는 머리에 인 보따리 무게에 눌려서 자라목이 되곤 했다. 집에 와서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면 고개가 없어진 것처럼 감각이 없이 먹먹해서는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엄마와 나의 행상 추억을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달 밝은 밤 들판은 유채꽃으로 눈이 부셨다. 가을이면 구절초도 만발하였다. 엄마가 이고 오는 보따리를 내가 대신 받아서 잠시 이고 오기도 했다. 그 고요한 밤, 엄마와 내가 가장 정다웠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어쩌다 요즘 이혼이 대세가 되었을까? 이혼은 흠도 아니고 숨길 일도 아니고 오히려 자랑할 일이 된 것 같다. 참고 살면 바보이고, 참지 않고 이혼하면 당당하고 주관 있고 뭔가 능력이 있어 보이나 보다.


결혼할 당시에 했던 서약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태나 아플 때나, 언제까지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한 것일까? 깨기 위한 약속이라면 그건 약속이 아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단코 깨지 않는 것이 서약이요, 약속인 것을 알기는 한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W교회 K목사님은 큐티목회를 하시는데 핵심은 가정중수이다. 불신결혼과 이혼은 금물이다.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깨끗한 호적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고난은 보석이고 축복이다.

K목사님에 따르면 설사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 해도 절대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 딴 살림을 차려도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도 이혼을 하면 안 된다. 배우자가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그 고난을 통해 내 죄를 보고 회개하기 위함이며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비추어볼 때 우리 엄마는 큰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도 믿지 않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알고 이런 사랑과 인내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오셨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중1 겨울방학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바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내가 드린 기도 때문이었을까? 엄마의 가치관과 인내심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이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고, 아빠와 살아주신 것이 생각할수록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 내 가정이 최고의 선물이다. 서로 참고 견뎌내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함께 갈 수 있음이 축복이다. 아들과 딸을 주시고 같은 기독교 신앙으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음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한 후에는 우리 가족 모두 저 높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우리 엄마>(서순오, 10호, 아크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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