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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Jan 20. 2023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영화 <밀양>

그 유명한 영화 <밀양>을 오늘에서야 보았다. 수원미디어센터에서 무료로 상영해 주는 건데, 딱 보고 싶었던 영화라 얼른 신청을 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주로 줄거리를 생각하며 보는 편이다.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아닌가를 따져본다.


<밀양>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아내인 신애가 아들 준과 함께 밀양으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차가 멈추자 카센터의 종찬이 와서 고쳐준다. (여기서 만난 종찬은 계속 신애를 좋아하면서 돕는 인물로 나온다.) 신애는 남편이 평소 내려가서 살고 싶어 하던 남편의 고향 밀양에 가서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산다. 틈틈이 땅도 보러 다닌다.


기독교인 약국집 약사가 신애를 전도한다. 남편을 잃고  내려온 딱한 사람에게는 보이는 몸의 병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도 치료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준이 유괴당한다. 돈을 요구해서 가져다주지만 결국 아들 준은 죽고 만다. 범인은 유치원 원장이다. 잡혀서 교도소 수감생활을 한다.


여기서 누구나 다 알게 돈자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걸 깨닫는다. 돈이 많으면 자랑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신애는 돈도 별로 없으면서 땅을 사려고 땅을 보러 다니는 데 거기서 유과범에게 걸려들고 만다.


신애는 결국 '아픈 영혼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교회에 나가게 된다. 한바탕 가슴을 치며 꺼억꺼억 토해내던 마음이 평안해지며 연애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좋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교도소에 찾아가 범인을 용서해주려고 한다.


그런데 범인은 교도소에서 전도를 받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신애는 기가 막혀서 그냥 나와버린다.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당사자인 신애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신애는 빗나간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에게 '내가 너를 이길 거'라고 말한다.


급기야 신애는 부흥성회 같은 야외집회가 한참 기도로 뜨거워지고 있을 때, 몰래 방송실로 들어가서 훔친 CD를 집어넣고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훼방 놓는다.


또 자신을 위하여 철야기도회를 하겠다는 약국집 남자 장로님을 유혹해서 드라이브를 하자며 야외로 나가 관계를 한다. 그리고 미친 듯이 행동한다. 다시 아들 준의 환각에 사로잡힌다. 동맥을 끊는 자해를 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퇴원하는 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려는데, 유괴범 딸이 소년원에서 배웠다며 미용보조로 일하고 있다. 그 애가 신애의 머리를 자르자 자르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온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을 사람이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반대로 사람이 용서한 것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둩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에 대해서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십자가 도상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사람의 용서를 받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완벽하다.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걸로 모든 죄는 다 사해진다.


유괴범의 구원 소식에 신애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점점 더 망가져간다. 더 많은 죄를 짓는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최후는 비참하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을 어쩌자고 사람이 토를 달며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보는 시각이 완전 다를 것 같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면 더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유괴범인 그의 걍퍅한 영혼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사건을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은 강도처럼 말이다.

영화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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