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겨울방학

by 서순오


가 바다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두 번째 맞이하는 방학이에요. 여름방학이 한번 있었지만 뭐 별다른 일이 없이 산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갯벌에서 놀거나, 강에서 멱을 감거나, 모래사장에서 발야구를 하거나, 그렇게 늘 해오던 놀이를 하면서 산골마을의 시간들이 흘러갔지요.

집에서 학교까지는 1시간 정도 걸어 다녀야 했는데,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을 건너고 용의 꼬리쯤에서 낮은 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죠. 마을에서 시작되는 강은 산자락을 돌아 학교 앞까지 쭈욱 이어져 흐르다가 바다가 되죠.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지만 이 강은 용이 흘리는 눈물일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용이 와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슬픔을 풀어놓았는데, 그 눈물이 모여 강으로 흐르다가 결국은 바다가 된 것이라고 했죠.

자랑 같지만 전 공부를 잘했고요, 사내아이처럼 활달한 성격을 가졌어요. 그 때문에 전 1학년 아이치고는 제법 골목대장 노릇을 하면서 지냈어요. 또래 아이들이 저를 졸졸 따라다녔고요, 언니 오빠들도 절 귀여워해주었죠. 학교 가는 게 너무나 즐거웠어요.

그런데, 방학이 되면 괴로움의 연속이었죠. 한꺼번에 주어지는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가끔은 주막에서 술에 취해 노름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부르러 가야 했고, 행상에 나간 엄마를 깜깜한 산 고개 어둠 속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설아, 요번 방학에 서울사람들 온단 소식 들었제 잉? 글씨, 우리 아부지가 이장님하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디.”

“야! 천천히 말 좀 해 봐라 잉?”

“와 있잖냐? 귀신놀이하던 최영감네 집, 뭐시기냐, 그 여자가 온당게. 서울로 도망가서 대학생이 되었다니께 잉?”

뭐가 그리 급한 지 뒤에서 좇아오는 오채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어요.

“근디, 이장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당게 잉?. 와룡리가 인자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당게.....”

그럴 수밖에 없었죠, 와룡리는 이제 막 숨을 깔딱깔딱하면서 다 죽어가고 있었거든요.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아버지들은 집에 와서 아내들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발로 차는 것은 물론, 자기 아이들을 발가벗겨서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홧김에 석유를 집에 부어 불을 지르기도 했거든요. 오월에는 시집갈 날을 잡아놓은 미자라는 처녀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기도 했어요.

“근디, 여자들이 이 산골 촌구석에 와서 뭣을 헌다냐? 무섭지도 않은가 잉?”

“우리들한테 공부도 갈쳐주고, 마을 질도 넓혀주고 그런다는디? 그 뭐시기냐. 봉사활동을 온다 하드라..... 잘 하믄 전기도 들어올지 모른당게 잉?”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소문대로 와룡리에는 서울사람들이 30여 명 들이닥쳤어요. 최영감네 빈집에 짐을 풀고,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깔았죠. 그 집 며느리였던 김끝예 언니(?) - 아줌마지만 지금은 대학생이니까요. - 는 약간 마른 작은 몸집에 당찬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어요. 몸에 비해 얼굴은 조금 둥그렇고 살이 찐 편이었는데, 환한 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어요.

“여러분, 저는 팔자가 사나운 여자입니다. 자식을 앞세우고, 남편마저 잡아먹고, 봉양하던 시아버지까지 병으로 돌아가시게 했으니, ‘사람 잡아먹는 여편네’라고 욕을 먹어도 싸죠. 그때 저는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죽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 마을을 떠난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 마을을 사랑합니다. 저의 꽃다운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곳이기 때문이죠. 저를 이곳에 다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빛을 보게 될 겁니다. 죽어가는 제게 비추인 이 아름다운 빛이 이제 여러분들의 앞길을 훤히 밝혀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도망갔던 최영감네 며느리를 보려고 모였지만, 김끝예 언니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하고 하늘을 우러르기도 하면서 어떤 신비한 힘에 휩싸이듯이 힘 있게 말을 이어 나갔어요.

저는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김끝예 언니의 눈에 꽂고 귀를 쫑긋 세웠어요.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어요.

고이고이 간직했던 마당의 우물이 꿈꾸기 시작했어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속의 우물은 용암이 되어 금방이라도 밖으로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았어요. 얼굴과 몸이 한꺼번에 달아오르기 시작했어요.

“얘가 왜 이래? 도대체 낮에 뭘 했길래...... 몸이 불덩이네, 설아, 정신 좀 차려봐라 잉?”

엄마는 밤새도록 마당에서 차가운 우물물을 퍼 와서 제 몸을 고루고루 찜질해 주었어요. 그날 밤 저는 김끝예 언니가 꾸고 있는 꿈의 한 자락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 언니가 길게 늘어뜨린 꿈 자락 하나가 한없이 풀어져서 제 몸에 휘휘 감기면서 저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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