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 국어 시간
나는 비를 좋아한다. 부드럽게 내리는 이슬비든 오늘같이 세차게 쏟아지는 장대비든 비가 내리는 날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름 소녀적 감성에 젖어든다.
특히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여고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탈고 안 될 전설>이라는 유주현 작가의 수필이 생각난다.
'어느 날 장대비가 몹시 쏟아지는데 뽀얀 우연이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찼다.'
'나는 원두막에 누워서 비몽사몽을 소요하다가, 빗소리가 너무도 장엄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늘과 땅과 공간이 혼연일체가 된 들판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어떤 물체를 바라보고 나는 눈을 부릅 떴다.'
'원두막에서 멀지 않은 밭 언저리로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서두르지 않고 유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자 한 사람이 등에는 분명 바랑을 지고 있었다. 회색 승복이 비에 젖고 있는 작달막한 키의 여승이었다.'
'잠시 후, 여승은 발길을 돌려 내가 있는 원두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잘 생긴 코 끝에서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난히 흰 얼굴과 원만한 턱을 가졌다.'
'그저 거닐었습니다. 하도 장하게 오시는 비이기에.....'
'스물 몇쯤이나 될까, 갸름한 얼굴에는 교양미가 깃들여 있고, 흠뻑 젖은 승복은 세련된 여체를 감싸고 있었다.'
수필 중 인상 깊었던 몇 군데 단락만 추려 보았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잘 생긴 코 끝에서 빗물이 흐르는 지적인 분위기의 여승을 기억하고 있다.
세상의 번뇌를 초월한 담백하고 초연하면서 신비롭다고 표현한 여승의 모습은 여고생인 나에게 비구니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 주었다.
수필의 나머지 줄거리를 요약하면 --
며칠 뒤 소나기가 퍼붓는 저녁나절 얼굴이 해사한 청년이 원두막에 찾아오고 근처 여승이 있을 만한 절을 찾는다. 4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왔다는 젊은이는 표정이 쓸쓸하고 왼쪽 팔이 하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참외밭머리에서 어제 본 젊은이가 며칠 전에 만난 여승과 헤어지고 있었다.
'승복 차림의 여인은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상이 되어 있었다.'
'별리, 나는 그들의 별리가 어떤 쓰라림을 지닌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진실과 사랑과 참회의 성스러운 자태로 보였다. 나는 그네들이 다시 만날는지 안 만날는지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들 남녀의 서글픈 전설을 뇌리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구상되지 않을 이 전설을 영원히 탈고하지 않을 작정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수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선생님이 이 수필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여승에 대한 이미지와 두 남녀의 밝혀지지 않은 스토리에 대하여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탈고 안 될 전설>을 배운 이후로 장대비가 내리면 나는 나도 모르게 "비가 참 장하게도 오신다"라고 표현한다. 마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여승에게 말하듯이 ㅡ
한여름에 쏟아지는 장대비
그것도 노란 참외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원두막에서 바라보는 장대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서두르지 않고 유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초연한 여승
학창 시절 나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광경은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장대비가 내릴 때마다 생각나는 <탈고 안 될 전설>을 다시 한번 읽었다.
젊은 남녀의 애틋한 이별이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