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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 관한 기억들

by 삼이공키로미터

어린이날이 되면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시골과는 사뭇 다른 서울 문화에 적응하느라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나는 사투리를 고치느라 애를 먹었고, (발표시간에 나는 분명히 표준말을 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발표를 하면 반 친구들이 까르르 웃으며 나를 놀렸다.)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자식들을 위해 서울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시려고 꽤나 애를 쓰셨다. 평소에는 일하시느라 아이들을 못 챙기시던 아버지가 유독 어린이날이 되면 우리를 사람이 미어터지는 건대입구의 어린이대공원에 데리고 가거나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가서 우리에게 책을 사주셨다.


교보문고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온갖 책으로 가득 찬 서가에 은은한 음악이 들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음악이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확실치 않다. 그래도 음악이 들린 걸로 하자.) 그곳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육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책과는 거리가 먼 삶은 사신 아버지는 자식에게 어떤 책을 골라주어야 하나 고민하셨고, 눈치 빠른 나는 동화 코너에서 중간중간 그림이 많이 있는 책 한 권을 골라 아버지께 사달라고 했다. 그 책 이름은 "꼬마 니콜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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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장난꾸러기 니꼴라와 친구들과의 에피소드가 세련된 삽화와 어우러져 뭔가 서울스러운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간결하지만 독특한 느낌의 삽화는 그간 보았던 책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나중에 알게 된 건데, 꼬마 니꼴라의 삽화가는 "르네 고시니"인데, "뉴요커"란 미국 시사주간지에 삽화를 그릴 정도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 이후로도 특별한 날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 근처에 있던 신촌문고에 가지 않고, 꼭 교보문고에 가셨다. 그분이 왜 버스를 한 시간가량 타고 그곳에 자식들을 데리고 가셨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며칠 뒤 어버이날 아버지가 집에 잠깐 들르실 텐데 한번 여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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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대공원은 어린이날만 몇 번 간 기억이 있는데 엄청난 인파에 부모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쫑긋 세우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기억이 먼저 난다. 크지는 않지만 동물원도 있었고, 종이로 된 표를 내고 놀이기구를 탔다. 귀신의 집에서 누군가 팔을 잡아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햇살 아래 아치 모양으로 반짝이며 쏟아지던 분수가 기억이 난다. 공원 한켠에서 김밥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출입구가 특이한 공원의 어느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공원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그 엄청난 흥분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코로나가 잦아들어 약간은 여유가 느껴지는 어린이날, 난 아이들과 가벼운 차림으로 집 근처 공원에 갔다. 아이들과 함께 뭔가 특별한 걸 할 수도 있었으나 아이들도 나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아이들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향기로운 꽃내음을 느끼며, 문득 공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족들을 챙기던 아버지와 책으로 가득 쌓인 서가에서 서성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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