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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Dec 30. 2021

50바트

*50바트 : 태국 돈 50바트는 원화로 환산하면 약 1,800원이다. 대략 태국 노점에서 국수 한그릇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여름휴가는 늘 8월이었다. 아이들의 방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휴가지는 이번에도 역시 태국이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하고, 음식도 훌륭한 탓에 우리 가족의 여행은 늘 태국이었다. 자주 온 탓에 굳이 왕국이나 수상시장 같은 유명한 관광지를 다닐 필요도 없었고, 골목 하나하나가 익숙했다.


몇 달 전 예약한 숙소는 방콕의 명동에 해당하는 수쿰빗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나역과 아속역 사이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은 풍성한 아침 뷔페와 퀸사이즈 트윈베드, 수영장 포함해서 10만 원대 초반의 가격이었다.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동안 창 밖의 풍경을 보았다. 거대한 빌딩 사이로 허름한 집들이 빼곡하고, 길 위에는 고급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사이좋게 길을 나눠 쓰고 있다. 묘한 곳이다. 대다수가 불교신자지만 게이가 어느 나라보다 많고, 길거리 음식은 2000원밖에 하지 않지만,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숙소에 도착했다. 몇 년 전에 묵은 밀레니엄 호텔이다. 짐을 풀고, 아이들은 재운 다음에 난 가벼운 차림으로 맥주라도 한잔할 요량으로 와이프와 길을 나섰다. 길 가득한 노점상에서 과일과 꼬치구이를 사 먹으며 방콕의 거리를 거닐었다. 바로 그때 그를 또 만났다. 행색을 보면 전형적인 거리의 노숙자다. 더운 날씨에 긴팔로 온몸을 감싸고, 엄청난 거리의 소음 속에서도 편하게 자고 있는 그의 특징은 바로 옷이었다. 그의 옷 한가운데 태극기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년 전에도 본 그 옷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는 그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 그때도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그를 여기서 만나니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염소 국수라는 희한한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갔다. 현지인들이 극찬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론리플랫닛에서 보고 알게 된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식당은 문 앞의 거대한 솥에서 이미 손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솥 안에는 온갖 부속의 고기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한약 향과 뜨거운 열기가 가게 안에 가득했다. 난 문득 솥 안에서 염소의 머리 비슷한 모양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아이들은 냄새가 싫은지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을 했으나 택시까지 타고 온 곳이니 맛이라도 보고 가자고 달랬다. 국수의 육수는 마치 한국의 보신탕 맛과 비슷했다. 질긴 고기와 향이 가득한 채소, 밀도가 높은 국물은 영락없는 보신탕 맛이었다. 바로 그때 식당에 들어서고 있는 그를 보았다. 태극기 노숙자였다. 식당 주인은 노숙자인 그의 복장을 개의치 않고 익숙하게 한 그릇의 국수를 그에게 대접했고 허겁지겁 국수를 비운 그는 바로 자리를 비웠다.


밤의 수쿰빗 거리는 화려하기가 마치 크리스마스이브 같았다. 한낮의 더위에 지쳐있던 사람들이 길에 쏟아져 나오고, 거리의 상점들은 불을 밝히고 손님들을 모은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은 들뜬 표정으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스쿰빗의 한 바에서 우리 가족은 간단히 음료와 술을 마시며 이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난 바에서 슬며시 나와 담배라도 한대 필 요량으로 술집의 옆 골목에 들어갔다. 그때 그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난 한국어로 물었고, 그는 어눌하기는 했지만 한국어와 영어로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와의 대화 내용은 놀라웠다.

그는 사실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고 했다. 5살 즈음 가족들과 방콕에 여행을 왔고, 길을 잃었다고 했다. 방콕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는 그를 태국인 부부가 데려가 키워주었다고 했다. 태국인 부모는 잡상인이어서 차에 이것저것 생필품을 싣고 태국의 전국을 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했다. 북부 치앙마이에서 남쪽 크라비, 동쪽의 사무이섬까지 그들은 길에서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그가 중학생 즈음 남쪽의 작은 섬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쳐 태국인 부모는 세상을 등지고, 그때부터 그는 홀로 살아갔다고 했다.


지옥 같은 섬에서 부모의 시체를 찾기 위해 몇 달 동안 헤맸으나 쓰나미는 모든 것을 바다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섬을 떠나 그는 그의 부모처럼 태국의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열대지방인 탓에 끼니와 숙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10월부터 찾아오는 건기에는 북쪽으로 우기가 찾아오는 3월에는 남쪽으로 열대과일을 따먹고,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으며 그는 길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한국의 부모를 찾아볼까 생각도 했으나 기억이 너무나 희미했다고 한다. 강변 근처였고, 작은 야산이 있는 서울의 변두리 마을에 산 것 같다고 했으나 그 이상을 기억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으나 가족이 기다릴 것 같아 난 그에게 우선 수중에 있던 50밧을 쥐어주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의 일정은 짜뚜짝 시장 방문이었다. 이곳은 태국 아니 동남아에서 제일 큰 규모의 노천시장이라고 했다. 시장 입구부터 인산인해였다. 각국의 여행자들과 호객을 하는 점주로 좁은 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나와 와이프는 두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8월의 더위와 습기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친척들에게 줄 기념품을 찾으려고 시장의 곳곳을 둘러보다가 마침 마음에 드는 거북이 조각상을 찾았다.  하지만 가격이 싸지 않았다. 난 흥정을 시도했으나 점주는 완강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와이프와 함께 한참 흥정을 하는 사이 마침내 원하는 가격에 합의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돈을 지불했다. 바로 그때 아이를 잡았던 손이 허전했다. 이럴 수가 내가 잡고 있던 둘째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와이프와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길가는 사람들마다 물으며 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아이를 찾는 방송까지 했으나 엄청난 인파의 소음에 방송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장을 다 찾아보았지만 아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의 감촉과 온기가 오른손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난 미친 듯이 길을 다니며 아이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의 거의 가지 않는 도축 시장까지 샅샅이 뒤졌다. 온갖 동물의 사체와 파리가 들 끊는 그곳은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때 둘째 아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손을 잡은 사람은 땀에 흠뻑 젖은 태극기 노숙자였다.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뺨에 주르륵 흘렀다. 아이는 내게 달려와 안겨 엉엉 울었다. 난 아이를 품에 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리고 태극기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떠듬거리며 말을 했다.


“아아 아니여. 괜차나요. 저정..정말 크은일 날 펀해서요.”

“아이 꼭 잘 보아요. 일어버리지 마요.”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난 가족을 데리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차 안에서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어느 때보다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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