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은 그날, 새로운 숨바꼭질을 결심했다.

by 다운

번화가에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려 지하 3층으로 된 구조인.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나 큰 기대감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그곳이 있는 번화가를 찾았을 때, 누구보다 30분 더 일찍 나오는 습관 때문에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방문한 것이 그곳과의 첫 만남이었다.


지잉, 유리로 된 자동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발을 딛자마자 코앞에 보이는 모던한 스타일의 간이 카페와 카운터, 은은하고 따뜻한 커피 향이 나쁘지 않은 첫인상을 안겨주었다. 커피를 사 먹는 것이 필수는 아니었는지, 카페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손님은 커피 없이 이 공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꽤 괜찮네,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 3층이라는 특이한 구조를 한눈에 확인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천국일까? 지하 2층에 배치된 전시회장, 그 밑으로 나란히 놓인 수많은 책장과 벽을 가득 메운 새 책. 그 사이사이에 놓인 여러 종류의 문구류는 배열을 망가트리지 않고 제 자리에 잘 놓여있었다. 지금 내 얼굴을 거울로 바라본다면 새 책을 모두 점령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반짝이는 두 눈이 가장 먼저 보일 것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그 이상의 불행을 안은 채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 주어지는 일이란 일을 모두 해치우고 밤늦게 들어오는 루틴을 십 년 넘게 해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먹는 밥, 마시는 물, 입는 옷, 다니는 학교, 몸을 뉘고 잠을 자는 집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발버둥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챈 덕에 우울하다거나 슬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낭떠러지 같은 생활을 가까스로 해내기 위해 누리는 모든 것은 헐어 있었다. 집은 당연하게도 부모님이 지금의 나와 또래였던 시절에 지어진 구축 건물이었고, 그 안을 간신히 채운 가구들은 꾸준히 수행한 잡일을 통해 기술을 터득한 아버지가 남은 목재나 천떼기를 떼다 만들었으며, 사복은 구제 시장에서 팔고 남은 것이나 친인척에게 사정사정해 받은 것, 교복과 교과서는 까마득한 선배가 졸업을 한 후 학교에 남긴 것을 물려받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새것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와 부모님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기에 그 갈망을 표출해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내게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코 하나를 말하고 싶다. 책. 따끈따끈하게 인쇄되어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새 책. 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떤 장르인지, 어떤 분야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책은 학교 안이나 집 근처 도서관에서 마음껏 읽을 수도, 일주일 혹은 그 이상 동안 집으로 가져 가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안에는 모두 누군가의 손때, 누군가가 감명받아 그어놓은 밑줄, 꾸벅꾸벅 졸다가 구겨지거나 접힌 귀퉁이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마치 지금 입고 있는 옷처럼, 서랍 어딘가에 박혀 있을 교과서처럼, 집 안의 커튼과 벽 한쪽 구석처럼.

새 책에 대한 갈망이 시작된 지점은 아주 우연한 한 순간이었다. 학원에서 알려준 교재를 사야 한다는 친구를 따라 들어간 서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학습지 코너로 들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가, 읽던 책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걸음을 옮기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비스듬히 놓인 책 모서리를 돌려놓으려 책에 손을 뻗었을 때, 그 책이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던 시리즈 소설의 다음 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 없이 작게 놀라며 책을 펼치자 도서관의 그 어느 책에서도 맡을 수 없었던 은은한 포근함과 깨끗한 향기, 어느 책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매끈함과 부드러움이 내 오감을 자극했다.

자신이 찾던 학습지를 결제한 친구가 나를 찾아와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나는 궁금했던 다음 권의 이야기를 하나도 읽지 못했다. 새 책의 향기를 정말로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맡고, 손자국 하나 나지 않은 책 표지와 내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 밤잠을 청하려 누웠을 때에도 코 끝과 손 끝에는 여전히 그 책이 남아있었다. 꿈에서도 나는 그 책 속에 온몸을 던지고 있었더랬다.


밤잠을 제대로 설친 덕분인지, 꿈에서까지 나온 새 책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는지, 겁을 상실한 나는 그 서점에 밤새 숨어있기로 결심했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서점으로 들어와 내부의 구조를 파악했다. 특히 천장과 벽 사방에 매달린 CCTV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다녔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내가 책을 아주 좋아하는 책벌레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그저 '새' 책이 좋아 말도 안 되는 숨바꼭질을 하려는 철없는 학생이었다. 숨바꼭질은 당연히 실패했다. 서점 문을 닫기 직전 내부를 확인하던 직원과 눈이 딱 마주쳤고, 도둑이 아니라는 오해를 간신히 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새로운 숨바꼭질 장소를 찾았다. 지하 3층으로 된 넓은 공간, 줄줄이 나열된 나무 책장, 구석에는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는 영어 학술서가 여러 권 꽂혀있었다. 책장 위쪽 모서리 옆, 귀퉁이 벽에 딱 붙어있는 CCTV, 조명이 없어 어두운 밑 공간.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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