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겨울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추위를 많이 타서, 라고 단순히 이유를 덧붙이기는 어려웠다. 눈이 내릴 때마다, 입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순식간에 칼바람을 타고 사라질 때마다, 살이 아린 추위에 온몸을 덜덜 떨 때마다,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겨울을 맞이했을 때 눈을 가까이서 본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은 신난 강아지처럼 밖으로 달려가 눈 속에 파묻히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지만, 유진은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창가 자리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눈은 갑자기 내려와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았던 흥미나 재미 혹은 감성적인 어떤 것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것이 바닥 위에 잔뜩 쌓인 이후에는 교통과 통행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쓰레기와 같은 어떤 것으로 치부하고 말았지만. 아무튼 안팎에서 눈이 내리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한 순간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를 제외하고.
나이를 먹고 부모님의 보호에서 벗어난 지금의 유진은, 얄짤없이 겨울의 새벽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학기 중 생활을 책임져 주었던 아르바이트를 가고 있다. 그의 업무는 새로 오픈한 지하 1층부터 지하 3층으로 된 특이한 건물에 가장 빠르게 도착해 문을 열고, 그곳을 지키고, 가장 늦게 나와 문을 닫는 것이다.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여유롭게 내려온 유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7시 10분 전. 유진의 출근 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한 셈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유리문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거침없는 그의 손길에 유리문은 곧 기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찬찬히 앞길을 터주었다. 유진은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 조금은 졸린 눈으로 새벽의 어스름한 빛이 간신히 밝혀 놓은 안쪽 공간을 향해 쭉쭉 발을 뻗었다.
이미 자신의 갈 길은 정해져 있다는 듯, 익숙하게 걸음을 내딛던 유진은 상층의 카페 매대 구석에서 손을 쭉 뻗어 스위치를 탁탁 켰다. 어두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눈부심에 살짝 눈을 찡그렸지만, 그는 곧장 입구로 발걸음을 옮겨 아래쪽 바닥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달칵거렸다. 좋지 않은 소리를 내며 열렸던 유리문이 지잉, 하고 아주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혔다.
마치 코딩된 컴퓨터처럼 상층을 활보하던 유진은 익숙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2층의 막 개최한 전시회장을 쓱 둘러보던 유진의 눈에 뒤집어져 있는 전시회 안내판이 들어왔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아래로 내려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안내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지나가는 손님들의 눈에 잘 띄도록 바로 세웠다. 동시에 유진은 저번 주에 새로 들어왔다던 전시회 담당 직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작은 키에 또렷한 눈, 진갈색 단발머리를 가진 또래의 여자. 남들은 귀여운 신입 직원이 들어왔다고 이야기했지만, 경비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이 공간을 지키는 것을 본인의 몫이라 생각했던 유진의 머릿속에 그 여자는 어리바리한 직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진은 안내판을 만진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직원에게 제때 청소를 해달라는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첫 계단을 익숙하게 밟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띈 무언가로 인해 내딛었던 걸음은 더 이상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책 냄새와 넓은 공간의 구조가 너무나도 익숙해 어둠 속에서 어디든 활보할 수 있었던 유진의 눈앞, 익숙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계단 끝 칸에 널브러진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분명 어젯밤도 모든 CCTV 화면을 통해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온 유진이었다. 물론 유일한 출입구인 유리문도 잘 잠가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어떤 경유로 이곳에 들어와 저기에 누워있는 것일까. 도둑인가. 하지만 여기에 있는 물건 중 큰돈이 될만한 건 정말 없는데. 죽은 건 아니겠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낯섦으로 바뀌자, 유진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리고 생사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지켜야 하는 곳에 들어와 있는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전시회 담당 신입 직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다한 생각을 애써 날리고, 유진은 그 사람의 형체를 똑바로 마주했다. 꿀꺽, 고요하다 못해 적막에 가까운 공간은 유진의 마른입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 소리마저 울리게 만들었다. 유진은 생각했다. 곧 출근하는 다른 직원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고, 자신은 이곳의 경비원으로서 낯선 것은 치워내야 한다. 사명감 비스무리한 것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가까스로 지하 3층에 도착한 유진. 하지만 형체에는 미동이 전혀 없었다. 정말로 죽은 걸까. 지금이라도 경찰이나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형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색색, 하는 옅고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든 것뿐이구나. 하긴 이런 데에서 하루 정도 밤을 지새운다고 목숨에 지장이 있을 리가. 그의 머리에는 어느새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이성이 찾아왔다.
유진은 그 형체를 깨우기 전, 모습을 쓱 둘러보았다. 언젠가 쉬는 날, 이 근방을 지날 때마다 보였던 옆 동네 여자 고등학교의 교복. 염색이나 파마를 하지 않은 단정한 생머리. 머리맡에 쌓인 몇 권의 책. 그저 책이 읽고 싶어서 과감히 일을 저지른, 평범한 학생이었다. 유진이 형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부스럭, 하고 형체가 걸치고 있던 패딩의 비닐 재질이 서로 맞붙어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으음, 잠에서 깨기 직전의 형체는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곧 눈을 뜬 형체는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온 유진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건 꿈인가? 곧 자신의 손에 채인 새 책의 질감과 반나절만에 익숙해진 공간. 형체가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