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戀心)

by 다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가을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 궁 안 대련장에 새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넓은 모랫바닥 위에 두 명의 무사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그들이 쥐고 있는 칼날은 몹시 차가워보였다.

또 한 번 가을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단풍잎 하나가 날아와 그들 사이에 안착했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맞붙었다. 서로를 밀어내는 힘이 잔뜩 들어간 칼날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거리를 두어 호흡을 정리한 뒤,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누군가 몸을 숙여 검을 피할 때면 공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했고, 두 사람이 바짝 붙었다 떨어지면 그 사이에는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렇게 몇 분을 겨루었을까. 한 무사가 지친 듯 허리를 숙였다. 다른 무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상대방의 검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멀리 날아갔다. 무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이 후두둑 떨어졌다. 굳건히 서 있던 다른 무사의 검날이 그의 목에 겨누어졌다.


“패배를 인정하시지.”


중저음의 목소리가 얼굴에 둘러진 천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저앉은 무사는 이마에 묶여있던 천을 풀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저 수련일 뿐인데, 꼭 이리 하셔야겠습니까?”


아리따운 목소리와 어울리는 크고 반짝이는 눈의 설이 고개를 들었다. 단오도 얼굴의 천을 걷어내 뚜렷하고 수려한 미모를 드러냈다.


“당연하지. 어떤 때에든 진정으로, 진심으로 대하라. 그게 내 뜻이다.”

“예예. 그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아주 잘- 알고 있습죠.”

“어허. 대답은 짧고 굵게.”

“예. 알고 있습니다!”


설의 우렁찬 대답에 단오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지으며 손을 뻗었다. 설도 미소를 띠며 단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설이 무사님!”


그때 한 노비가 대련장을 가로질러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설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온 노비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헥… 서찰이 왔습니다요…”

“서찰? 누구한테서?”

“그, 그것이…”

“뭘 꾸물거리는 거야.”


설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린 서찰을 낚아채갔다. 그녀는 서찰을 읽더니 곧 굳은 표정을 지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도로 접었다.


“그, 대련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무슨 내용이길래…”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은 빠르게 대련장을 나갔다. 노비는 단오의 눈치를 보더니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 후 설을 따라나갔다. 홀로 남은 단오는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는지, 두 사람이 나간 대련장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날 밤, 모든 일과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설. 품 속에 넣어두었던 서찰을 꺼내,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내려갔다.


‘동생의 상태가 위급하니, 산수유를 구해 귀가하거라.’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동생의 증세가 더욱 나빠진 것이었다. 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내려두고 나갈 채비를 했다. 천으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 위로 해진 밀짚모자를 쓰고, 투박하게 지어진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다. 그야말로 사내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리따운 외모는 숨길 수 없었다.

방에서 나온 설은 빠르게 궁을 탈출하기 위해 담을 넘기로 했다. 담벼락 앞까지 달려가 담을 넘으려던 순간, 멀리서 걸어오는 단오와 눈이 마주쳤다. 설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겼고, 단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냐.”

“아, 저는… 대감마님 댁의 머슴이온데, 심부름 차 궁 입궐을 허락하시어…”

“…나가는 길은 저쪽이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설이 목소리를 굵게 내며 얼굴을 숨기자, 단오는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설이 다시 탈출을 시도하려던 그때.


“으윽-”


멀쩡했던 단오가 가슴을 손으로 감싸며 풀썩 주저앉았다. 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위급한 동생을 낫게 할 산수유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지만, 자신의 대장이자 소중한 전우인 단오를 내칠 수는 없었다.


“설아…”


쓰러진 단오의 입에서 설의 이름이 나왔다. 설은 자신이 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단오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식은땀을 흘리는 단오의 머리를 무릎에 뉘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자, 단오가 빠르게 손을 낚아채 잡아끌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확 가까워졌다.


“역시, 설이 너냐?”

“…대장님?”


단오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예쁘게 미소지었다. 가까이서 단오를 마주한 설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뭐, 뭡니까! 정말로 아프신 줄 알고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너야말로 뭐냐. 오밤중에 그 차림새로 어딜 가려고?”

“…그게-”


어쩔 수 없이 단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설. 사정을 들은 단오는 무언가 결심한 듯 빠르게 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나왔다.


“가자.”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동행하는 것이다.”

“…예?”


설은 단오의 대답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단오는 남장을 하였음에도 아리따운 설의 미모를 훑어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사내 행색을 하였어도, 어디로 보나 너는 여인이다. 혹시 아느냐, 못된 마음을 먹은 힘 좋은 사내가 널 어떻게 할지.”

“걱정도 팔자십니다. 이래 봬도 저도 궁을 지키는 무사-”

“갈 길이 머니 서두르자꾸나.”


앞장 서서 발걸음을 옮기던 단오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아, 잠시 들를 곳이 있다.”


설과 단오가 도착한 곳은 어의가 일을 하는 공간이자, 모든 약초가 보관되어 있는 내의원이었다.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물건을 나르고 있던 궁녀와 눈이 마주쳤다.


“쉿.”


단오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대며 궁녀에게 씩 웃어보였다. 궁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급히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니요?”


단오는 궁녀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개어 잡고, 몸을 낮추어 궁녀를 올려다보았다.


“저희 부하가 훈련 중 심하게 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산수유가 꼭 필요하다 합니다.”

“산수유요?”

“예. 귀하디 귀한 것인 줄 알지만, 소중한 부하이자 전우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단오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궁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오의 그럴싸한 연기에 설은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단오의 미남계라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를 눈앞에서 본 궁녀는 빠르게 산수유를 찾아와 단오에게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내의원을 나오자마자 단오는 촉촉한 눈동자를 걷고, 해맑은 표정으로 설에게 산수유를 건넸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응? 무엇이 말이냐?”


능청스러운 단오의 모습에 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아주 쉽게 담장을 넘었고, 빠르게 수풀과 민가를 지나 설의 집까지 다다랐다.


“의원 나으리!”

“설이냐? 오느라 고생 많았다.”


설은 소중히 안고 있던 산수유를 의원에게 내밀었다. 의원은 빠르게 산수유를 갈아 옅은 숨을 내쉬고 있던 설의 동생, 석의 입가에 조금씩 흘려주었다. 산수유의 효과 덕에, 석의 안색은 조금씩 차분해졌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 내일이면 말끔히 나을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


의원이 설의 집을 떠나고 난 후, 민가의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설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동생의 모습을 계속해서 살폈다. 단오는 아무 말없이 어두운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단오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를 발견한 단오가 손짓했지만, 설은 왠지 모르게 요동치는 심장에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을 이상하게 여긴 단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느냐. 너도 어디 아픈 것이냐?”

“…아닙니다.”

“얼굴이 빨갛다. 혹 동생을 보살피다 병이 옮은 것은-”

“아닙니다. 날이 밝기 전에 어서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설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단오를 뿌리치고 집 밖을 나섰다. 단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설의 뒤를 따랐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 바닥을 보며 걷던 설은 단오를 힐긋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장님은 원래 모두에게 친절하십니까?”

“내가? 음… 글쎄… 내가 그랬던가.”

“그게 아니라면, 왜 오늘 절 도와주신 겁니까? 산수유도 그렇고, 저를 따라 집까지 걸음해주시고, 아까도…”


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단오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단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대장님이 제게 왜 이러시는지.”

“설아, 그게-”

“이런 마음을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알지만.”

“…”

“대장님을… 연모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밝은 달빛이 수풀을 헤치던 두 사람을 밝게 비추었다. 설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달빛을 받아 슬프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과는 다르게 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하십시오. 이 연심이 더 깊어지는 건,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설은 뒤돌아 발걸음을 뗐다. 그때, 수풀 속에서 자라난 덩굴이 발에 걸리고,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 했다. 단오가 빠르게 다가와 설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어쩌냐.”

“…”

“난 그 연심이 더 깊어졌으면 하는데.”


단오의 따뜻하고도 달콤한 말에 설은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단오는 씩 웃으며 설을 일으켜주었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의 품에 담았다.


“나도, 너를 연모한다.”




숏드라마 공모전으로 제출했던 작품을 문득 발견해, 저의 공간에 한 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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