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10월 말일에 했고, 입사는 12월 첫날에 했다. 오래 일할 수 없어서 일용직으로 들어갔고, 이전 회사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새롭게 자리를 텄다.
얼마나 가까운지 이전 회사가 보인다. 사무실까지 보인다. 운명이 장난치는 건지 지금 내 자리에 앉으면 이전 회사는 물론이고 내가 일하던 사무실까지 보인다. 정확히 4층. 까만색 모니터 위로 짙은 푸른색 창문이 멀게 보인다.
가끔 보면 운명은 참 하찮다. 하찮은 곳에서 운명을 맞이한다. 운명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순간이 꽤나 있었다.
스무 살 시절, 타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알고 지내던 놈이었다. 녀석은 내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를 만난 듯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이 싫었고,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녀석은 무안했는지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만약에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먹었더라면 그냥저냥 인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운명은 하찮다. 때로는 이만한 운이 차라리 다른 곳, 이를테면 복권에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할 만큼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운명이 얼마나 가벼운지 실감한다.
얼마 전엔 사회복무를 하던 곳이 있는 건물에 우연히 들렀는데 그곳에서 일할 때 만난 직원 분을 마주쳤다. 사회복무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나였지만 끝이 나쁘진 않았기에 혹시나 해서 메신저로 연락을 보냈고 그분이 맞다는 답을 받았다.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운명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라는 말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운명이나 우연이나 나타날 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그것을 운명이나 우연으로 만드는 건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다.
만약에 스무 살 시절 내가 그 친구를 반갑게 맞이해서 별 볼 일 없는 우연이 그럴싸한 운명이 되지 않았을까. 또는 며칠 전 만난 직원 분을 내가 구태여 먼저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럴듯한 운명이 하찮은 우연이 되지 않았을까?
운명을 하찮다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저 놀라고 싶을 따름이다. 놀라운 일을 보고 놀라고 싶다. 운명이든 우연이든 벌어지지 않을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고 싶다. 그런 특이한 상황이 오면 굳어버리는 습관을 버리고 싶다. 좋든 싫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것이 운명이든 우연이든 아무렴 좋다. 특별한 일을 특별하게 맞이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특별하다는 걸 그때 당시는 알지 못한다. 특히 인연이 그렇다. 다음에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모습이 영영 사라진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허무한지 차라리 운명이 없기를 바란 적도 있다.
운명을 하찮다고 말한 건 잘못인 듯하다. 그만한 낭만조차 없다면 인생을 살아가기 벅차지 않을까. 지금 내가 앉은자리에서 옛 사무실이 보이는 것도 지나고 보면 어떤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즐거운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