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HSP, 퇴근하고 나서

by 한톨

심리학자 최재훈 씨가 쓴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에서는 HSP란 개념이 나온다. HSP는 ‘Highly Sensitive Person’을 줄인 말로 ‘몹시 예민한 사람’이란 뜻이다. 지은이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독자가 HSP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테스트를 하나 준비했는데, 23개 문항 중 자기가 해당하는 문항이 15개 이상이면 HSP라고 했다. 나는 21개였다.


나는 HSP, 즉 몹시 예민한 사람이다. 말도 느릿느릿하게 하고 행동도 재빠르지 못해서 둔한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정말로 예민한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민함은 눈치가 빠르다는 뜻은 아니다. 미각, 식각, 촉각 등 감각이란 안테나가 굉장히 날카롭다는 뜻이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에선 그것을 재밌게 표현했다. ‘감각의 블랙홀’이라고. 퍽이나 맞는 말이다. 나는 감각의 블랙홀을 달고 산다. 그렇지만 둔해 보이는 게 고민이었지만, 지은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서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만 두들기며 하루를 보내고 왔다고 하더라도 온몸이 녹초가 돼서 금방 곯아떨어진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나도 모르게 모든 신호를 빨아들이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쉽게 지친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이 안 좋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는 체력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다. 예컨대, 등산을 하거나 달리기를 한다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오래 할 수 있다. 선수만큼 잘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선수에게 “일반인치곤 잘 뛴다”라는 말을 들을 만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

그만한 체력을 가졌지만 감각 안테나가 너무나도 뾰족한 탓에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금세 지친다.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한두 시간만 있어도 지치는 데에 반해 혼자 있으면 몇 시간이고 생생하다.

그런 탓인지 백수로 지닐 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침대에 억지로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아직 에너지가 너무나도 많이 남아서 억지로 에너지를 태워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부턴 다행히 그럴 일이 없었다.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늘었다.

HSP는 퇴근하고 나서 곧장 잠에 든다. 정말 스트레스받은 날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 짓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온다는 걸 알지만 그런다. 그냥 자는 게 최고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진 못할 만큼 스트레스받는 날도 있다. 어쩔 수 없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먹구름이 떨어뜨리는 물방울의 개수를 세는 일처럼 인간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감각의 블랙홀을 달고 사는 덕분에 직관이 놀랍도록 정확할 때가 종종 있다. 흔히 말하는 “싸하다”라는 느낌은 그 어떤 근거보다 더 훌륭한 근거가 되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싸한 느낌이 있는 사람과 친해지지 못한다. 친해지더라도 억지로 밀어내려고 할 때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했다. “예리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참말로 맞는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고통받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면 편하지 못한 나, 다시 말해 HSP는 날마다 살아가는 일이 힘겹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를 저버릴 순 없으니까 오늘도 출근하고 또 퇴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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