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산책 3

2022년 12월 18일부터 12월 24일까지

by 한톨

※본문이 따로 있습니다. 본문이 궁금하다면, 하단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매일 글쓰기를 합니다. 일주일간 쓴 것 중 마음에 드는 문장을 뽑아 올립니다.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세요!



※해당 회차부터 날짜가 따로 없습니다!


> 나는 왜 글을 쓸까? 최초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확실히 답하진 못하더라도 글쓰기를 시작한 동기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외로웠고, 힘들었다. 하지만 말할 곳이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일기였다. 대학생 시절에 공책에 일기를 쓰며 오늘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안타깝게도 대학교에 가서 쓰기 시작했던 일기는 불태워버렸다. ‘새로운 삶’을 위해 불태웠으나 일기장을 불태우는 것이 인생을 바꾸진 못했다.


> 난 감정적이다. 그러니 감정을 더 잘 다루어야 한다.


> 꿈을 꾸다가 문득 가족에게 엄청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에게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그게 나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껍질을 벗겨낸 감정이었다. 나는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아쉬운 점이 없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정말로 그렇다.


> 대양 한가운데에서 바다를 찾고 있는 불가사리에게 늙은 현자 고래가 말한다. “바다를 찾는 것(Seaing)은 어떻게 보느냐(Seeing)의 문제야.” ……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일상을 살다 보면 종종 훌륭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걸 글로 쓰면 천재 소리 듣겠어!”라고 느끼는 생각들이 수도꼭지 튼 듯 쏟아진다. 주로 소설을 읽거나 색다른 경험을 할 때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런 생각들은 금세 말라 사라진다. 수도꼭지는 꽉 닫히고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때늦은 물방울 몇 개가 똑똑 떨어질 뿐이다.


> 항상 까부는 아이가 무대 위에 서면 수줍음을 타듯, 나의 생각도 나올 공간을 주면 숨는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숨어버린 생각과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음에도 행하지 않는 행위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마음만 남는다.

아는 대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도대체 나의 인생은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매일매일이 똑같은 걸까.

나는 어떻게 이렇게 차분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비트겐슈타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 떠오르는 대로 정확하게 인용하겠다. “나는 서툰 기수처럼 말 위에 올라탔다. 내가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말의 성향이 온순한 덕분이다.” 훌륭한 문장은 이런 문장 같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 나도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 나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지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글이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매개체다. 왜냐하면 글은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쪽을 보여주면 다른 한쪽은 보여줄 수 없다.


> 어떤 날은 글쓰기보다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나,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을 나눈 혈육 같다.

아무리 싫고, 밉더라도, 내가 나로 존재하는 동안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혈육 같다.


> 문학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문학의 절반은 독자가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나 음악, 동영상이나 소리, 사진, 그림은 그럴 수 없다. 그것들은 특정 이미지(소리나 그림)를 공유하나 문학은 그렇지 않다.

문자를 읽으면 머리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방식이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각자의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 만약에 엄한 멘토가 날 자리에 앉혀놓고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

그는 나를 종일 감시하고 있다. 내가 무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훤히 꿰뚫어 본다. 그런 그가 다저녁 지난 지금 나를 붙잡고 “오늘 무얼 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고 답해야 할까. “게임이요.” “안 하겠다고 했잖아?” “동생이 하고 있어서 했어요.” “그게 끝나고 나서 혼자 하던데?” “재밌어서요.” 우린 침묵한다. 그리고 내가 익숙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그러면 멘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몸집을 성난 고양이처럼 부풀린다. …… “다음이란 없어!” 그가 소리친다. 그렇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왜 행동을 하지 않는 거야? 작가가 되겠다며!” 나는 입을 꾹 다문다. 혼날 준비를 마친다. 문제는 혼나고 나서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나를 그만한 애정을 가지고 혼낸 사람이 나에겐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 나를 그렇게 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십 대가 반 넘게 지나갔지만 여전히 그런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 이렇게 말하면, 내가 심신 미약이나 정신이상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일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때리려고 할 때 내가 나를 보호하는 일처럼, 그렇다. 생각보다 그런 경우는 많다. 누가 어떤 말을 하거나, 내가 어떤 상태에 몰리면, 나는 반사적으로 어떻게 하거나 어떻게 행동한다.


> 그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 얹혀 있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만큼 힘들다.


> 만약에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지금의 나를 고르겠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었고,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지난 세월을 난 다시 겪고 싶지 않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 과거로 돌아가 봤자 나는 나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여러 번 과거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것의 결과가 지금의 나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 지금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생각은 늙은 태아처럼 죽고 말 것이다. 생기 있게 살아있을 몸짓이 더러운 오물이 되어 몸 밖으로 나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 미래의 내가 얻는 무언가에 따라 잣대를 정하지 말고 지금 당장을 열심히 살면 된다는 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본문 : https://blog.naver.com/hats4/222965393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