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탱하는 보잘것없는 믿음에 대하여
인생에서 가장 무력한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스물 한살 무렵의 군대 입영소를 떠올린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지만, 나에게 그곳은 거대한 ‘부적합 판정소’와 같았다. 신체검사에서 걸러지지 못한 나의 질병과 예민한 기질은 훈련소의 딱딱한 공기와 마주하자마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입소 5일 만에 ‘귀가 조치’를 받았다.
귀가자(歸家者). 신병 교육을 받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그 명칭은 나에게 일종의 ‘낙오자(落伍者)’라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군대라는 집단조차 나를 품지 못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마주할 사회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용할지를 예고하는 듯했다.
짐을 싸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러 복잡하고 피곤한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의 어느 날. 나는 무채색 건물 내부에 무덤처럼 고요한 대기실에서 이름 모를 전우 한 명과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몰랐다. 그저 집단으로부터 뱉어내졌다는 동질감만이 우리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는 반쯤 햇빛에 젖은 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가, 대뜸 나에게 말을 건넸다. 어떤 맥락도, 전조도 없는 고백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저, 천만 원을 모았어요. 천만 원을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사춘기 여학생이 비밀스러운 첫사랑을 고백하듯, 그는 고개를 다소곳이 떨군 채 자신이 모은 그 숫자를 거듭 뇌까렸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천만 원이라는 돈이 무슨 의미인지, 왜 그가 지금 이 순간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이내 깨달았다. 그에게 ‘천만 원’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무너져 내리는 자존감 끝에서 붙잡고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자, 세상이 자신에게 ‘부적합’ 판정을 내릴지라도 스스로를 지탱해 줄 단 하나의 ‘증거’였다.
신념, 사랑, 종교, 철학. 인간을 살게 하는 거창한 가치들이 많다지만, 때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숫자’나 ‘사실’ 하나가 사람을 구원하기도 한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밀려나 삶이 난파선처럼 흔들리던 그에게,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내가 모은 천만 원’이라는 사실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파제였을 것이다. 그는 그 숫자를 방패 삼아 사회가 던진 ‘부적합’이라는 창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어떠했는가. 그 시절의 나에겐 나를 지탱해 줄 천만 원도, 확고한 신념도 없었다. 나는 그저 사회가 나에게 붙인 딱지를 그대로 가슴에 붙인 채, 내가 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인지만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전우의 고백은 나에게 묻는 듯했다.
“너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이니? 너에게는 천만 원만큼이나 단단한 무언가가 있니?”
그 전우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길 없다. 하지만 햇빛 속에 잠겨 “천만 원을 모았다”라고 말하던 그의 옆모습은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삶이 나를 부정하고, 집단이 나를 밀어낼 때, 인간은 무엇으로 버티는가. 거창한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내가 직접 일궈낸 작은 성취,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작은 기록 하나만 있어도 인간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삶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사실 무너진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던 ‘세상의 규격’이었다. 귀가 조치를 받고 기차역으로 향하던 길, 나는 내가 그 전우처럼 단단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것이 돈이든, 글이든, 혹은 나만이 아는 작은 진실이든 상관없었다. 세상의 판정관들이 내 인생에 어떤 등급을 매기든,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나만의 ‘천만 원’이 필요했다.
여름의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낙오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나는 그 전우의 고백 덕분에 아주 작은 용기를 얻었다. 인생은 누군가에게 적합함을 인정받기 위해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 줄 나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긴 여정임을, 그 이름 모를 전우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