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HSP의 퇴근길

온 세상의 소음을 빨아들이는 감각의 블랙홀을 지닌 채 산다는 것

by 한톨

나는 남들보다 쉽게 지치고, 남들보다 더 자주 숨어야 하는 사람이다. 심리학에서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책에서는 이런 부류를 HSP(Highly Sensitive Person), 즉 ‘몹시 예민한 사람’이라 부른다.

어떤 이들은 예민함을 까칠함이나 유난스러움으로 오해하지만, 내가 겪는 예민함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 기관의 필터가 남들보다 성기게 만들어져서 생기는 물리적 현상에 가깝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걸러지지 않은 채 뇌로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날마다 감각의 블랙홀을 짊어지고 거리를 나서는 셈이다.


직장 생활은 HSP에게 거대한 고문 장치와 같다. 사무실 안의 공기는 결코 멈춰 있지 않다. 옆 자리 동료의 불규칙한 타자 소리, 탕비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커피 향, 상사의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기 속 흐르는 긴장감까지.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신호들이 나에게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박힌다. 나는 그저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퇴근 시간이 되면 폭풍우를 온몸으로 맞은 듯 녹초가 되어버린다.

HSP의 퇴근길은 생존을 위한 탈출기다. 지하철의 소음과 사람들의 체취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이어폰을 끼고 방어막을 친다. 하지만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는 피로감은 막을 길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면, 하루 동안 내 안테나가 수집한 온갖 잡음들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내 안의 블랙홀은 이미 포화 상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감각적 예민함이 신체적 강인함과 정반대의 층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등산을 하거나 달리기를 할 때는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지구력을 발휘한다. 혼자 있을 때, 자연의 신호만을 받아들일 때 내 몸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문제는 ‘타인’이라는 변수다. 사람과 섞이는 순간, 내 안테나는 과부하가 걸리고 에너지는 급격히 떨어진다. 1시간의 회의가 10km의 달리기보다 나를 더 깊은 무력감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좀 둔해져 봐”, “성격이 예민해서 그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눈이 밝은 사람에게 보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안 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예민함을 선택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리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 고통의 정체는 결국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너무 얇다는 데서 온다.

퇴근 후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비로소 블랙홀이 닫히는 것을 느낀다. 어떤 소리도, 어떤 시선도 닿지 않는 완벽한 고립 속에서만 나는 나를 회복한다. 직관이 너무 예리한 탓에 사람의 ‘쎄한’ 느낌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고, 그 때문에 타인과 깊게 섞이지 못하는 나를 가끔은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예민함을 나의 결함이 아닌, 특별한 사양(Spec)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기도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세한 감정의 결을 읽어내고,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철학적 의미를 길어 올리는 나의 글쓰기는 결국 이 지독한 예민함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귀를 막고 싶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더 깊은 곳을 바라보라는 감각의 명령이라고. 비록 남들보다 쉽게 지치고 더 자주 숨어야 할지라도, 나는 이 섬세한 안테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1급수 인간으로서 내가 세상을 느끼고, 기록하고, 끝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전 13화12. 소설가를 꿈꾸는 아마추어의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