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4살에 잘려 나간 편도선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순간들

by 한톨

나는 태어나서 수술을 받은 적이 딱 한 번 있다. 사고 때문이 아니라 의학적 필요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수술이다. 중학교 1학년, 만 나이로 열두 살이던 해에 나는 편도선을 잃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코골이가 심하다는 것. 그 수술이 사춘기로 접어든 소년의 몸에 어떤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혹은 내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따위는 깊게 고려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내 신체의 일부를 타인의 결정에 의해 떠나보냈다.

인생에서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결정하지 못한 채 이 세상에 던져진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적 조건—키, 외모, 지병, 그리고 태어남까지도—은 이미 정해진 기본 사양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잉태한 정자는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기어코 생명을 쟁취해냈고, 태아가 된 나는 예정보다 두 달이나 일찍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내 자아보다 앞서 있었다.

편도선 수술의 기억은 나에게 지독한 무력감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아픈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보다 '효율'과 '관리'가 우선시되는 세계. 열 살 무렵 치과 의사가 치아 교정을 권했을 때는 하기 싫다며 당당히 거절했던 내가, 어째서 중학생이 되어서는 편도선 수술대 위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을까. 부모님은 내 코골이가 듣기 싫어 편도선을 잘라내는 수술은 단호하게 밀어붙이면서도, 정작 내 인생의 미관을 결정할 교정 수술은 내 어린 변덕에 맡겨버렸다. 이 모순적인 배려 속에서 나는 내 몸의 주인 노릇을 온전히 해본 적이 없었다.

수술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가래침을 모으지 못한다. 가래가 생기면 시원하게 뱉어내지 못하고 그저 삼킬 뿐이다. 수술 전, 별명이 '카악퉤'였을 만큼 맘껏 가래를 모아 뱉던 그 더러우면서도 개운했던 감각은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잘려 나간 편도선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배출할 권리조차 빼앗아 간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목 안쪽이 텅 빈 동굴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리 없는 부재가, 나를 향한 타인의 결정들이 남긴 흉터처럼 가끔씩 의식될 뿐이다.


인생은 인정하기 싫은 것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잘려 나간 편도선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우울한 성격, 기립성 저혈압, 그리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예민함까지. 이 모든 결함은 내가 고른 것이 아니지만, 결국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나의 일부다. 자아는 늘 세상을 미워한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원하지 않은 환경과 신체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고 싶어 한다. 나 역시 한때는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비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연극의 무대 장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주인공이 무대를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을. 부모가 내 편도선을 잘라갈 수는 있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이 연극은 계속된다. 진짜 연극은 내가 이끌어야 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막간극과 예기치 못한 사고들조차 결국 내 서사의 일부로 끌어안아야 한다.

가래를 뱉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비루한 일상처럼, 인생에는 삼켜야만 하는 오물들이 가득하다. 억울함, 수치심, 그리고 타인의 결정에 의해 무너진 자존감까지. 하지만 그것들을 삼키면서도 나는 살아간다. 잘려 나간 자리의 부재를 문장으로 채우고,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복수하듯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을 기록한다.

나의 편도선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통과하는 나의 목소리는 더 이상 타인의 결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비록 녹슬고 거친 목소리일지라도, 이것은 오롯이 내가 내뱉는 나의 진실이다. 나는 이제 삼키는 법이 아니라, 내 안의 것을 온전히 쏟아내는 법을 글로써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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