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품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다시 배운 인류애
딱 하루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도착하고 싶은 날은 정해져 있다. 2년 전, 나의 반려견 ‘아리’가 세상을 떠나던 날이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다리 앞에 남겨진 자의 마음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찢어지는 상실감이며,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다른 이름이다.
아리는 손바닥만할 때에 나에게 왔다. 소중한 인연이 늘 그러하듯, 아리가 정확히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마주했을 때 녀석이 내 손바닥 안에 폭 담길 정도로 작았다는 사실만은 선명하다. 부모님은 녀석을 밖에서 키워야 한다고 하셨지만, 손바닥만 한 생명이 밖에서 벌벌 떨고 있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고집을 부려 녀석을 품에 안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아리와 나의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동거의 시작이었다.
세월은 나를 청년으로 만들었고, 아리를 늠름한 성체로 키워냈다. 녀석은 더 이상 손바닥에 담기지 않았고, 마당을 지키는 듬직한 가족이 되었다. 아리는 두 번의 출산을 통해 ‘까미’ 같은 충직한 새끼들을 남겼고, 자신의 생명력을 온전히 소진하며 성실하게 살아냈다. 하지만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아리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내가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아리가 떠나던 날, 나는 녀석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리의 눈빛은 이미 먼 곳을 향해 있었고, 몸은 중력조차 이겨내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리를 홀로 남겨두었다. 손바닥보다 작을 때는 곧 죽어도 지켜주겠다던 그 다짐은, 서른을 앞둔 어른의 비겁함 뒤로 숨어버렸다. 죽음의 냄새가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이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녀석이 차가워지는 순간을 내 품에서 지켜봐 주는 대신, 나는 문을 닫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비겁한 회피였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리가 떠나는 그 밤 내내 녀석을 안아주고 싶다. "고생했다, 고맙다"라고 귓가에 속삭이며 내 체온이 녀석의 마지막 온기가 되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인생에는 '만약'이 없다. 아리가 떠나고 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시작하는 용기보다 끝까지 곁을 지키는 용기가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그러나 깨달음은 그 값을 너무나도 크게 치뤘다. 상처 입은 마음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고, 그것을 어루만져준 것은 그 다음 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낯선 이의 호의였다.
첫 직장이었던 대형 서점에서 책 수레를 끌고 가다 턱에 걸려 책이 쏟아질 뻔했을 때, 말없이 수레를 잡아주던 이름 모를 남자. 그 짧은 순간의 도움에서 나는 '인류애'라는 거창한 단어를 실감했다. 아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나 같은 인간조차,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울게 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함을 빚지며 살아간다. 아리가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쳐주었다면, 길에서 만난 낯선 이는 상처받은 나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는 친절을 가르쳐주었다. 작은 일은 종종 큰 것을 바꾼다. 수레를 잡아준 그 손길이 내 트라우마를 막아주었듯, 아리와의 이별은 나를 조금 더 성숙한 슬픔을 아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기꺼이 수레를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을 품어주지 못한 미안함은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돌처럼 남아있겠지만, 그 무게 덕분에 나는 타인의 고통을 조금 더 깊게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가 남기고 간 온기는 이제 내 문장이 되어 흐른다.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해주었던 그 작은 생명에게,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온기를 나누는 모든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나는 이 기록을 바친다.
인생은 결국 사랑한 만큼, 그리고 그 사랑을 잃어본 만큼 깊어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