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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May 05. 2024

글쓰기 연습장 5


나는 물에 뛰어들고 나서 헤엄을 배우는 유형이다.

일단 한다. 일단 하고 나서 생각은 나중에 한다.

그것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으나, 위험 없는 인생이 더 위험하다고 믿는다.


하지 않을 이유가 백 가지가 넘더라도 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다면 한다.


내 안에는 작은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하고픈 일이 있으나, 나는 무시한다.

항상 그랬다. 부모가 성가신 아이를 무시하듯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더는, 더 이상은.


시간은 관리할 수 없다. 변수가 너무나도 많고, 멈출 수도 없다.


‘나의 인생’이라는 건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보다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문학이 꿈보다 해몽이라고 한다면, 작가는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면 된다.


사교, 즉 사람을 사귀는 일은 음식에 넣는 소금과 같아서 너무 적어도 문제고,

너무 많아도 문제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울고 싶어 진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갓난아기처럼 울고 싶다.


세상이 어떠한가보다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전자는 바꿀 수 없지만, 후자는 바꿀 수 있고, 후자가 진정 의미 있으니까.


누군가 내게 뭐 하며 사냐고 물을 때,

당당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을 때.

그래서 찝찝해서 떠올리려고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은 유기체다. 하나를 바꾸면 다른 것도 바뀔 수밖에 없다.


알 수 없음, 애매모호함에서 상상력이 나오고,

그로부터 문학의 아름다움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모든 것을 안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다행히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살아갈수록 말수는 적은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능하면 장점이든 단점이든 티 내지 않는 것이 낫다.


인생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든지 정의할 수 있다.

완벽한 것은 없으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있는 것처럼.


태어났다고 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다.


만약에 인생에서 단 한 가지만 알 수 있다면, 나는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것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단 한 명뿐인 사람이기도 하고, 많고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기도 하다.


시대라는 용광로에 인간을 붓고, 녹이면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편안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편안함을 떨쳐내고 뛰어다니는 건 위험하다. 겨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세상을 뛰어다니는 사람은 보다 절박하겠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다.


왜 사람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발암물질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식탁에 올라오는 돼지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관심을 조금도 갖질 않을까?


나는 돈이 싫지만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풀어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충분히 벌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내가 신경 쓸 사람은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해야 하는 사람, 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뿐이다. 그 외의 사람에겐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좋다.


당최 않은 이유 때문에 행동을 망설이는 게 난 진짜 싫다. 무형의 감옥이 나를 옥죄는 기분이다.


판단은 감정이 내리고, 이성이 이유를 만든다.


나의 좌우명은 'Now or Never'이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로 직역하면 될까. 쉽게 말하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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