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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Mar 31. 2023

소멸은 존재의 이전

독서일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미치 앨봄

시한부 생명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표현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눈떠보니 이 세상에 있더라는 것이다. 비록 부모의 품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내던져졌다”는 말 자체에는 이미 고독과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감내해야만 하는 운명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태어남이 내 의사와 상관없었던 것처럼 떠나감도 나의 의사와 상관이 없다. 참 기가 막히지 않는가? 나타남과 사라짐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의지 밖에 있다는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절대자인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내던져짐’과 ‘사라짐’은 숙명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시한부생명을 지닌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뇌의 많은 부분은 비워진 채로 태어난다. 비워진 뇌는 자라면서 학습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습득한다. 가장 효율적인 적응과 진화의 방식이다.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를 본능에 각인시키기보다는 학습에 의해 배우고 깨닫는 절차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어떤 이는 빠른 학습으로 본질을 깨달아 운명을 개척한다. 어떤 자는 죽음의 문턱에 와서야 엄중한 운명의 진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난날을 후회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류를 대신해 유한한 삶의 본질을 직관했고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짧은 시간 머물다 가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지만 질문에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는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과정이며 전투이며 욕망의 충족과 좌절이다. 인생의 영광과 환희, 좌절과 치욕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의미에 대해 자각할 수 있다. 그때가 바로 ‘실존’의 순간이다.  


 소중한 것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소중함은 소중함의 대상이 소멸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나에게 늘 있는 대상은 실존하기에 사유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생명의 소중함은 생명의 소멸 목전에서야 알게 되며, 집의 소중함은 집의 부재 속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있음’ 속에서 대상의 소중함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눈과 귀는 본능과 욕망 속에 쉽게 흔들린다. 미래의 ‘없음’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의 ‘있음’에 현혹당한다. 소중함의 가치는 오직 대상의 부재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가시화된다. 항상 있을 것 같았던 가족, 친구, 건강 그리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소멸직전에 깨닫게 된다. 갖지 못한 많은 것들을 꿈꾸며 갖지 못함을 한탄하지만 정작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체험은 필요하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기획투사’는 나의 삶에 수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남겨진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해 보는 연습을 미리 해보는 것이다. 실제 앞으로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이 나에게 하루밖에 남지 않았어도 꼭 해야 하는 일인지 물어보라고 말한다. 지나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했는지 알게 된다.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의 길이


 시간의 본질은 마음에 있다. 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어떻게? 시간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분산이기 때문이다. 내 밖의 시간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시간은 인간의 의미 속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역동적으로 변한다. 내 의식 안의 시간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하루는 빛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길고 지루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분열된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로 이어져 후회와 원망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과거의 아쉬움과 미련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나의 육신은 지금에 묶여 있지만 영혼은 과거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고칠 수 없는 그 시절을 붙잡고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을 소비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기대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꿈과 소망으로 미래를 그린다. 장밋빛 환상에 빠진다. 그러나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나의 노력과 행동이 미래의 꿈을 현실화시킨다. 그러나 만약 나의 영혼이 지금에 있지 않고 미래에 가 있으면 그것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무지개인 것이다.

  나는 오로지 지금을 산다. 지금만이 나의 기회이고 현실이다.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과거로 흘러간다. 찰나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흐름 속에 나의 영혼도 함께 흘러간다. 나의 영혼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지나간 과거 속에 붙들리기도 하고 오지 않은 미래에서 기대를 부여잡고 허우적거린다.  분산된 영혼은 후회와 헛된 바람과 부러움과 질투 속에서 헤맨다. 

  나에게 시간은 언제나 지금으로 흐른다. 이 시간의 법칙을 이해한 자는 시간의 길이를 상상이상으로 늘일 수 있다. 이것이 시간의 비밀이다. 아무나 닿을 수 없는 신비이다. 언제나 지금을 살라. 나중을 이야기하지 말고 어제를 떠올리지 마라. 오늘을 말하라. 지금 내가 할 일을 말하고 오늘 무엇을 할지 말하라. 영원히 살  것처럼 지금을 살아라.  “카르페 디엠” 지금을 즐겨라.



나와 우주


나는 우주만물 속에 지극히 작은 먼지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나는 작은 존재다. 그러한 나의 위치를 자각한다면 나를 우주의 법칙에 일치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순리에 따라 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태어남과 소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는 동안 할 일을 자각하고 그 일에 충실하며 대자연의 구성원으로 사는 것이다. 나와 우주의 합일은 곧 내가 우주가 되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 속에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우주의 법칙에 일치시키는 데 사용하게 되면 존재는 빛을 발한다. 빛나는 별이 된다. 수천억 개의 별 중 하나가 된 나는 우주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한다. 내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내가 있다. 태어나 소멸되기까지 주어진 유한의 시간을 유한으로 여기지 말라. 영원한 순환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소멸은 소멸이 아니다. 존재의 이전이다. 또 다른 탄생의 밑거름이다. 별이 죽어 새로운 별의 탄생을 낳듯이 나의 죽음은 다른 누구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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