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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Apr 01. 2023

왜 4월은 잔인할까?

고전산책 06 <황무지> T.S 엘리엇


해마다 4월이 오면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시 <황무지>. 대다수 사람들이 첫 구절만 기억하는 기이한 운명을 타고난 시. 4월은 왜 잔인할까?  




4월이 잔인한 이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시가 공감의 예술이라면 누군가는 이 구절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 하필 4월만 잔인한가. 인생의 모든 날들이 잔인하지 않은가? 난 인생이 행복하다. 저 시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등등. 하지만 적어도 시인의 눈에 4월은 잔인하게 보였다. 지난한 겨울, 모든 것은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잠에서 깰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오랫동안 길들여졌던 무기력과 나약함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 처절한 투쟁이 벌어진다. 생명체는 호메오스타시스(항상성)를 지닌다. 그 항상성을 깨기 위해서 온갖 사투가 벌어진다. 라일락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일상의 나약함을 벗어던지는 혁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내 몸을 쳐 과거의 안이함을 죽이고 다시금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투쟁을 포기한다. 소나기를 피해 휴가를 가고 무기력한 일상을 반복한다. 재생과 부활이 고통과 투쟁을 동반하기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겨울이 따뜻하다. 땅속의 삶에 길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싹이 나려면 한 방울의 말라붙은 수분이라도 남김없이 끌어당기며 내 몸을 키워야 한다. 꽃이 피려면 대지를 뚫고 태양을 향해 솟구쳐야 한다. 그래서 4월은 잔인하다. 재생과 부활을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생의 의지도 부활의 의욕도 없다. 운명에 몸을 맡기며 안락과 편안함에 젖어 타락에 빠진다. 황폐한 정신, 나약한 육체, 시인이 본 시대의 모습이다.


 



<황무지>는 왜 난해한 시로 악명을 떨쳤을까? 



 <황무지>는 내용의 난해함으로 유명하다.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구절과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수많은 해석과 추측을 낳았고 역설적으로 <황무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시는 전체가 5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1. 죽은 자의 매장

2. 체스놀이

3. 불의 설교

4. 물이 불러온 죽음

5. 천둥이 한 말  


 

그래서 시인은 자기가 만든 시에 스스로 주석을 달아 주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L. 웨스턴의 <제식>, 셰익스피어의 희곡, 바그너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단테의 베이트리체, 희랍의 신화, 유럽의 성배신화 등 무려 30여 편이 넘는 많은 고전과 신화의 장면을 부분적으로 차용해서 의미를 대신했다. 따라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용된 원전의 장면과 내용을 정서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해야만 했다. 시를 보면 각 장마다 공간이동이 이루어진다. 공간만 변하는 게 아니고 시간도 뛰어넘는다. 작품 속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 단절된 채 제시된다. 따라서 의미의 연계를 찾기 위한 독자의 필사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등장인물과 배경, 사건은 고도의 상징과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비평가는 전체구성을 볼 때 전혀 통일성이 보이지 않아서 시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


 



왜 엘리엇은   <황무지>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헌정했을까?



시의 제일 앞부분에서 엘리엇은 에즈라 파운드의 이름을 거론한다. 두 사람은 각별했다. 천재의 탄생조건을 연구했던 칙센트 미하이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천재의 탄생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개인적 영역에서의 탁월성(Indivisual), 해당분야의 전문성(Domain), 해당분야의 활성화와 인정(Field) 이 그것이다. 이를 줄여서 IDF라고 한다. 여기서 IDF의 모든 요소를 다 언급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황무지>의 탄생에 동료 에즈라 파운드의 공이 지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탁월한 시라도 시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역사 속에 그대로 묻힐 수밖에 없기에 시를 세상에 알리고 탄생시킬 누군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유럽문학계(Field)에 <황무지>를 내놓고 세상에 각인시킨 장본인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엇의 시세계에도 영향을 주어 강렬한 이미지를 생명으로 하는 모더니즘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다. 한 마디로 에즈라 파운드가 없었다면 <황무지>는 탄생할 수 없었다. 천재의 탄생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원래 <황무지>의 초고는 길이가 현재의 두 배가 넘었다. 엘리엇은 이 시의 초고를 완성한 후 에즈라 파운드에게 보냈다. 에즈라 파운드는 냉철한 비평가의 눈으로 절반 이상을 덜어낼 것을 진지하게 엘리엇에게 권한다. 친절하고 설명적인 구절들, 장황하고 긴장감 전혀 없는 표현들을 모두 버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엘리엇이 지녔던 문제의식인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감수성은 철저하게 인정한다. 자기 몸의 절반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새로 태어난 <황무지>는 함축과 상징, 각 장간의 이질적 전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시가 되었다. 여러 번 읽어도 파악되지 않는 의미, 그러나 시의 분위기가 주는 신비감과 무게감 때문에 단 번에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닌 시가 되어 오히려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가 시인이자 비평가로 활동하던 에즈라 파운드는 자기와 똑같은 길을 따라온 엘리엇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자기가 본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는 극찬과 함께 영국문학계에 엘리엇을 소개해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등 이젠 새로울 것도 없는 그렇고 뻔한 작품들 속에 강렬한 이미지와 세련된 문장, 절제된 감정으로 단련된 새로운 표현방식은 단번에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황무지>는 그렇게 유럽의 문학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황무지는 왜 걸작으로 평가받게 되었을까?




천재의 탄생배경과 그 작품과의 연관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소설의 경우 주로 작가들이 중년을 넘어서야 원숙한 걸작이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시의 경우 젊었을 때 가장 탁월한 작품이 탄생한 확률이 높다고 한다. 아마 시가 가진 특징 때문일 것이다. 시는 원숙하고 노련한 기술보다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날카로운 지성이 필요하다. 특히 새로운 표현양식을 탄생시키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시인의 번득이는 직관과 예리한 사고가 극에 달할 수 있는 시기는 가급적 젊은 시절일 가능성이 크다. T.S 엘리엇의 경우 <황무지> 이후 비교적 좋은 작품들을 내놓기는 했지만 <황무지>를 능가하는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다. <황무지>는 시인의 최고이자 유일한 걸작이 되었다.  


<황무지>가 지닌 파격은 표현의 참신함이다. 물론 절친 에즈라 파운드의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이전의 시와 다른 시를 창조했다. 에즈라 파운드와 엘리엇은  상징주의와 낭만주의가 지나친 감정과 의도의 표현으로 오히려 예술의 본 목적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좋은 시란 시인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전달할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낼 장면이나 상황을 언어로 창조하는 것이다. 엘리엇이 초기에 쓴 작품과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보들레르의 시를 한 번 비교해 보자





<깊은 심연 속에서>


                                              보들레르 


내 마음 떨어진 캄캄한 심연 밑바닥에서,


연민을 비나이다, 내 사랑하는 유일한 그대여.


이건 납빛 지평선의 침울한 세계,


거기서 어둠 속에 공포와 모독이 떠돌고


열기 없는 태양이 여섯 달을 감돌고,


또 여섯 달은 어둠이 땅을 덮으니,


짐승도, 개천도, 푸르름도, 숲도 없구나! 


 



 <프루프록의 사랑노래>     


                                             T.S 엘리엇  


등을 창 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주둥이를 창 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에 혀를 넣고 핥다가


하수도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머뭇대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등으로 받고,


테라스를 빠져나가, 별안간 한 번 살짝 뛰고는


때가 녹녹한 시월 밤임을 알고


한 번 집 둘레를 돌고, 잠이 들었다. 


 

현대인에게 아주 익숙한 표현이다. 두 시의 차이점이 보이는가? 감정의 직접적인 묘사와  지극히 절제된 차가운 관찰. 이 것이 상징주의와 모더니즘의 차이점이다. 엘리엇은 환유와 은유를 적절하게 활용해 어두운 도시의 저녁을 시적으로 그려낸다. 이전의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다. 감정을 직설적이고 원초적으로 내뱉는 데서 벗어나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유럽의 문학계는 새로운 양식에 환호하며 모더니즘의 물결에 몸을 내맡긴다.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 활약했던 대표적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 김기림의 시를 보자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중에서>   


 


이상과 김수영 또한 뛰어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이다.  



내왼편가슴심장(心臟)의위치(位置)를방탄금속으로엄폐(掩蔽)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


겨누어권총(拳銃)을발사(發射)하였다. 탄환(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貫通)하였으나그의


심장(心臟)은바른편에있다.


                                                             - 이상 오감도 시제십오호 중에서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풀>  


  


이들 시의 원조가 T.S 엘리엇의 <황무지>이다.   <황무지>는 함축과 절제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장면과 장면을 병치시켜 의미를 전달한다. 이를 콜라쥬 기법이라고 하는데 제시된 장면과 장면 사이에 불친절한 간극이 있어 독자들의 상상을 원천적으로 자극한다. 감정은 극도로 절제된다. 전혀 상관없는 장면들이 나란히 혹은 이어서 등장한다. 독자들은 낯설고 혼란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집요하게 시속으로 뛰어든다.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작품이 지향했던 시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고 선두에는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가 있었다. 그는 창조자였다. 모든 창조는 이전 성취의 받아 안음이자 결별이다. 새로운 성취는 늘 그러하듯이 온갖 핍박과 비판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황무지>는 비교적 무난하게 이 과정을 통과했다. 시대는 새로운 형식의 등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황무지>가 주는 의미  



1920년대 유럽은 정신적으로 황폐했다. 이성과 합리성의 역설적 결과인 전쟁은 인간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윤회와 재생, 부활의 의미를 되찾고 싶었다. 겨울동토처럼 사람들의 내면은 얼어붙어 있고 좀처럼 부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봄날 내리는 소나기가 다시 새 생명을 길러내듯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다시 희망과 약동의 기운이 생겨나기를 시인은 간절히 소원했다. 먼 미래, 과학과 문명이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 때 우리는 다시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으며 부활의 희망을 노래할지도 모른다. 위대한 걸작은 시공을 초월하는 법. 올해도 어김없이 잔인한 4월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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