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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Feb 03. 2023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려는 노력

고전산책02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1> 고전역학의 절대성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실로 엄청난 업적이었다. 지구와 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운동법칙의 발견이자 확립이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가 천체운동의 법칙과 동일하다는 통찰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를 수학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과학의 승리이자 인류의 승리였다. 뉴턴역학은 고체, 기체, 유체 등 세상 사물의 어디에도 예외없이 적용가능하고 계산이 가능한 완벽한 법칙이자 유일한 법칙이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아는 것은 힘이 되었고 자연에 대한 지식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과학혁명은 한층 더 가속화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전역학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것이 계산가능하고 예측가능하다는 환원주의를 탄생시켰고 세상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기에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높아지게 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과학의 제분야인 화학, 물리, 생물, 지질학, 등의 연구가 활성화되고 많은 과학적 업적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전역학에 들어맞지 않은 현상은 고전역학이 틀리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대상으로 언젠가는 극복해야할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2> 무너지는 절대성 



1905년 스위스 베른에서 아인슈타인은 한 해 동안 무려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중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가 흔히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진 논문이다. 이 논문이 바로 250년간 절대적 위치를 점해온 뉴턴의 고전역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길이가 달라진다는 주장은 발표 당시에 5명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우스개소리가 들릴 정도로 파격적이었고 상상을 초월한 이론이었다. 10년 뒤 발표한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에 대한 재해석으로 새로운 우주론을 열어주었다. 뉴턴은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는 설명했지만 중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은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등가법칙을 이용해 중력을 너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우주의 탄생과 변화과정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제공해 이후 빅뱅이론을 가능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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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또 다른 차원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이 한계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바로 새롭게 발견된 원자의 세계였다. 원자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고전역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들이 발견되었다. 바로 원자안의 세계였다. 뉴턴에 의하면 움직이는 물체는 수학적 계산에 의해 위치나 에너지의 양이 계산이 가능했지만 원자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계산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확률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다.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상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인과론이 붕괴되는 근본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과학의 근본대전제를 다시 수립해야 하는 엄청난 주장인 셈이다.  


<부분과 전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책의 많은 내용이 어떻게 원자안의 역학을 새롭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토론의 내용이 담겨 있다. 20세기는 새로운 과학의 세기였다. 고전역학이 무너지면서 인류의 과학이 새로운 연구목표와 과제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3> ‘안다(know)’와 ‘본다(see)’가 의미하는 것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안다’의 의미였다. 과학에서 안다는 것은 주로 경험, 다시 말해 관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론이나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하게 되는데 이때 검증은 주로 사람의 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연구 대상이 원자의 세계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단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앎’의 과정에 장애로 나타난다. 즉 이전에는 당연시 했던 인간 감각의 정확성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정확한 것인가? 우리는 정말 대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사실인가? 이 뿐만이 아니다. 원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수단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본다’는 행위는 빛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빛은 입자이며 파동이다. 빛을 쏘아야만 대상을 볼 수 있는데 봐야할 대상이 전자라면 빛을 쏘는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전자에 빛을 쏘는 순간 전자가 튕겨져 나간다는 것이다. 보려는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객관적 관찰이 가능하지 않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절대성과 인과론을 실질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안에 존재하는 전자의 움직임에 대해 확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하였고 이 이론으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관찰자의 관찰행위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인간 인식의 절대성과 완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확률로만 존재하는 과학을 인정할 수 없었고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4> 거인의 어깨 



<부분과 전체>에는 과학발전에 대한 핵심 논쟁이 들어 있다. 이후에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핵심은 과학발전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냐 단절 속에서 패러다임 자체가 통째로 바뀌면서 이루어지는가의 논쟁이다. 흔히 단계적 진보는 쉽게 말해서 업그레이드라고 볼 수 있다. 조금씩 앞 선 사람들의 업적을 발판삼아 부족한 점들을 개선, 보완한다는 관점이다. 패러다임의 교체는 완전히 기본인식 틀을 교체한다는 주장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관점은 후자의 관점이다. 그 이유는 양자역학은 우리가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자체를 다시 재정립해야하기 때문에 연속선상에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본다’ ‘안다’, ‘객관적’, ‘주관적’, ‘사실’ 등등 과학연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필수 언어를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연구자체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대상도 있다. 알지 못하던 대상, 전혀 새로운 연구대상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언어가 필요하다.     


 

4>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려는 노력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래서 과학자로서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독일 극우 젊은이와의 대화도 인상 깊다. 왜 독일을 위해 일하지 않느냐는 청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은 그 주장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 주장의 실현방법 즉 수단의 정당성에 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탄압하고 독일을 전체주의로 몰고 갈 때 많은 주변국의 과학자들이 그에게 망명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제안을 거부한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 탈옥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이유도 비슷했다. 설령 나에게 위험이 닥칠지라도 내가 여기를 떠나면 이후 독일을 바른 자리로 놓고 다시 세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고 생각했다. 핵무기가 가능하다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었을 때 독일에서도 당연히 이 연구를 위해 팀을 만들었다. 그때 하이젠베르크는 비용대비효과와 연구시간을 보았을 때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않다는 보고서를 의도적으로 제출한다. 같은 시간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를 제조할 지도 모른다는 아인슈타인의 제안으로 맨하탄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적어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양심에 대해 고민했던 과학자였다. 그의 노력덕분에 독일은 전후 빠르게 핵발전소의 평화적 이용과 연구를 허락받게 된다.  



과학자에게 호기심과 진리를 향해 도전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분야의 나무를 가꾸면서 놓치게 되는 전체 숲에 대한 인식도 없어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연구가 인류에 미치게 될 영향,   나의 연구가  정말로 인류에게 선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자기성찰이 그것이다. 20대 중반에 벌써 대학교수가 되어 물리학계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하이젠베르크는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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