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뒤로하고 남쪽 국경 지대의 한적한 시골마을 체스키크룸로프로 왔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장거리 버스이동에 지칠 무렵 도착했는데 겨울왕국이다. 온 도시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다. 작은 개울을 건너 도시의 관문 체스크크룸로프성의 아치다리와 만났다. 한 100미터 될까 두 개의 동산을 이은 아치형 연결다리가 여행자를 반긴다. 버스에서의 피곤함은 사라지고 또다시 새로움에 매료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식 버스 터미널은 마을 반대편에 있다. 매력적인 풍광으로 여행자를 홀리려는 마을과 버스기사의 담합(?)으로 정식 버스터미널 반대편의 작은 정류장에 내려 준 것이다.
마을은 진짜 작다. 강이 휘돌아 나가면서 그 안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다. 강원도 동강의 어느 마을과 비슷하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만들어 준 마을이다. 거기에 오래된 교회와 정감 넘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매력적인 관광도시가 된 것이다. 건축양식도 한몫했다. 첨탑이 핵심인 고딕양식이 아니라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양식까지 다 있어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아치교를 지나면 실개천이 나오고 나무다리가 있다. 동화적이고 목가적이다. 물론 외곽지역은 아파트도 있고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올드타운은 작고 소박하다. 화가 클림트의 절친이었던 에곤 실레가 이 마을에 반해 작업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3일 정도 머물면서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돌면서 멋진 광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관광객들이 하루 일정으로 많이 온다. 단체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나 한국인들이다. 그 외에 커플로 온 사람들도 많다.
체코 프라하에서 한국인들을 정말 많이 봤다. 처음에는 반가워서 아는 체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만 반가운 거였다. 3,4일 코스로 관광온 사람이 같은 한국인을 보고 뭐가 반갑겠는가? 나만 발트 3국과 폴란드를 거쳐 왔기에 한국 사람 볼 일도 없었고 한국말을 쓸 기회가 없어서 그랬던 거다. 이걸 알고 난 뒤부터는 봐도 모른 척했다. 입장이 다르면 태도도 달라지는 법. 좋은 경험이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60여 일의 여행을 하면서 이동과 머무름을 반복했다. 이쯤 되면 일상이 된 것이다. 새로움에 매료되어 신기해하면서 보낸 날들도 있었고 새 사람을 만나는 경험도 했다. 돌아보니 몇 가지가 정리가 된다. 우선 내가 간 곳들은 전부 대도시 중심의 유명한 곳이다. 숙소도 중심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했는데 전부 각자의 일정과 계획으로 움직이기에 깊은 만남이 어렵다. 그래서 훑고 가는 느낌이다. 일상에서의 만남은 그렇지가 않다. 소속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만나기에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고 다툼도 생긴다. 역으로 그 속에서 깊은 교류가 일어난다. 애증은 한 몸이라고 갈등과 다툼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자기의 영역을 일부 오픈해서 공유하기도 한다. 사실 이 관계가 사람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여행이 지속되면 외로움도 커진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장기여행은 힘들다. 물론 아주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지만 그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영역과 상대의 영역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친밀성은 어느 정도 시간에 비례한다.
새로움이 계속되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역설이 생긴다. 반응이 둔감해진다. 새로움에 지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적인 일상이 그리워진다. 고향이 그리워진다. 이른바 향수병이 생긴다. 수십 년을 살아온 곳과 음식,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치는 것이다. 평범한 하루하루는 사람들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실 소중하다. 어떻게 매일매일이 신비와 기적과 재미와 흥미로 가득 찰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루 세끼 특별한 반찬이 아니라도 잘 챙겨 먹고 일하고 끝나고 아무 일 없이 보내는 소소한 일상은 특별하지 않지만 소중한 것이다.
내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외롭고 고된 여행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목표와 목적이다. 이루고자 하는 것, 원하는 것이 있기에 버텨 낼 수 있다. 새로운 인생에 대한 계획,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구상,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세워져야지만 돌아간다는 애초의 계획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다. 조금씩 향수병이 몰려온다. 잠깐 귀국해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할까? 이런 생각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그때마다 되새긴다.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하지 않았냐고.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방향의 삶을 살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지금도 계속 그런 다짐을 하며 여행을 이어간다. 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생각의 씨앗이 싹이 날 때까지 고독한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살짝 고백한다. 무심코 내 안에서 떠올랐던 작은 생각의 씨앗들, 그동안 내가 무시했던 그 씨앗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 심지어는 20년 만에 싹이 나고 있는 것들도 있음을.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대로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무시했던 그 생각들이 지금 다시 오롯이 싹이 나려 하고 있다. 내가 나를 몰랐던 것이다. 다 그렇지 않은가. 작은 꿈 하나씩 가슴에 묻어두고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여행 속에서 내가 얻은 단 하나의 교훈을 말하라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 길로 가야한다는 사실이다. 장애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럴수록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쉽게 얻은 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간절함과 땀과 노력으로 얻은 것만이 참다운 성취감을 안겨준다. 하바드 대학의 칙센트 미하이 교수가 그의 저서 “FLOW”에서 행복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뭐냐고 묻는다면 “몰입”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했다. 행복은 동 시간적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서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 경우 행복했던 시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에 미쳐 있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무아지경, 행복의 심리학적 실체다. 나는 예술을 통해 이 행복을 획득하기로 했다. 창작의 고통, 아무도 몰라주는외로움. 그리고 무아지경, 혹독한 수련과 단련의 과정, 엄청난 몰입을 요구하는 이 일들을 하기로 한 것이다. 2개월의 여행동안 이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더욱 구체화시키기 위해 나는 이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과거의 생각과 삶의 무게들이 하나둘씩 나를 떠나고 있다. 잊고자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고 있다. 나는 이 과정에 만족한다.
하루하루의 생활만 보고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나의 남의 인생 전체를 조망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동안의 삶이 만들어온 관성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괴롭고 막막했다. 당연히 힘이 들 수밖에.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나를 위로하며 여행을 이어나간다.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의 글을 읽어보면 지금과 많이 다르다. 길은 존재하는 길을 갈 수도 있지만 만들어서 갈 수도 있다. 길이 안 보이면 만들어서 가면 된다. 지금의 내 생각이다. 길이 안 보인다고 고백했던 나의 첫 여행기를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어디에 있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 인생의 길이다. 거기에서 최선을 다해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는 다짐을 한다.
교회는 안 다니지만 “Way Maker”라는 CCM을 좋아한다. 이 새벽에 그 노래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