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수) 오전 6시
과학과 종교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논쟁 중 하나가 신이 있느냐의 논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과 종교의 논쟁이다. 이 논쟁이 왜 쓸데없냐 하면 일단 서로 출발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논쟁은 같은 용어를 공유하고 서로가 동의하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 둘은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과학은 이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한 신비의 영역에서 바라본다. 그러니 이 둘의 논쟁은 애당초 불가하다.
마치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네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꼴이다. 둘 다 각자 고유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판단과 선택에 맡기면 될 일이다.
빅히스토리
호모사피엔스는 30만 년의 역사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신앙과 믿음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과학의 도전을 받은 건 불과 최근 300년 정도이다. 최초의 도전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된 게 아니라 진화했다는 다윈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 이었다. “뭐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이게 말이 되냐고. 저따위 쓰레기 같은 주장을 하다니” 대개 이런 반응이었다. 그 뒤 이른바 다윈의 후예라고 불리는 진화생물학자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며 진화론에 살을 보탰다.
인간 신앙의 역사는 매우 길다. 이성이 있으되 아직 체계화되지 못한 이성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 인간은 미개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은 말 그대로 절대적 존재였고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 길고도 긴 무지의 상태를 깨려는 최초의 시도가 그리스 밀레 투스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자연철학자들의 등장이다. B.C 5세기 지금부터 2,500년 전이다.
인간이 지녔던 믿음체계, 즉 원시 종교들은 대개 만물에 다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지역적 특성에 따른 샤머니즘이고 체계적 교리와 이론을 갖춘 종교가 탄생한 것은 2000년이 채 안 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압도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학의 힘에 많이 경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인간의 삶가운데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실존의 문제
그 이유는 먼저 실존적 이유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구원론이다. 구원이란 누가 나를 구해준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가 있다. 정도가 소소한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만 어떤 일들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감당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종으로서의 호모사피엔스 는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 거대 문명을 축적해왔지만 개개의 인간은 극히 나약하고 미약하다. 질병이나 삶의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궁극에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존적 문제가 있다. 난관에 부딪힐 때 의지하고 나를 구원해 줄 절대자를 찾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싯다르타는 왕자라는 귀한 신분을 타고났지만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고민하다가 결국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에 나선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에 직면할 때 인간은 자기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과학의 힘으로 해결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이 있다고 믿는가? 기적은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만약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주 드문 확률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야 라고 말한다. 어떤가? 너무 차갑고 삭막해 보지이 않는가? 그래서 우리 삶에 신비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 것은 나름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순수함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위로가 되어 준다.
오늘날 기업화 된 거대 교회의 속물주의와 종교는 있으되 진실한 신앙은 없어 보이는 세태가 믾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영역은 인간 내면의 은밀한 고유영역으로 지속될 것이다.
지성의 한계
지성의 영역이 가진 한계도 분명 있다. 나는 세상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서 물리 학의 가장 기초적인 학문인 입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의 근원물질을 밝히려는 인간의 노력인데 그러려면 태초의 시작과 진행과정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빅뱅의 재현인데 알프스 기슭에 설치한 거대 입자 가속기(CERN)를 통해 이를 알아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시작은 분자, 원자의 발견이었다. 그 뒤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발견되었다. 또 그 뒤 쿼크라는 존재가 발견되었고 그 마저도 쪼개서 힉스라는 입자까지 나왔다. 힉스는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4년 발견되었는데 2013년 실험을 통해 존재를 확인했다고 한다. 현재는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 궁극의 끝은 어디일까? 반대로 좀 더 크게 가보면 지구가 있고 태양계가 있고 은하계가 있다. 현재 기술로 관측가능한 은하계가 1,700 억 개 정도라고 한다. 관측이 가능한 은하의 수이니 더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한 개의 은하 안에 수십억 개에서 수 천억 개의 태양계가 있다고 하니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이 거대한 우주의 시원은 어디일까?
과학은 인과의 학문이다. 원인과 결과를 통해 법칙을 완성하고 이 세상을 더 알아간다. 알면 알수록 거대하고 또는 작아진다. 거기다 계속 왜라고 질문하면서 파고들 때 더 이상 알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이 나온다. 왜를 물어볼 수 없는 영역이다. 과학적 용어로 말하면 우연이다. 우연히 대폭발이 생겼고 그래서 이 우주가 탄생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그럴 때에도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르는 게 아니고 아직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알 게 될 것이다.라고
초월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닿을 수 없는 곳, 이성을 초월해야 갈 수 있는 곳.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굳이 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그 영역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이 편히 쉬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핵심중 하나가 부활이다. 거듭남이다. 그런데 내가 거듭나고 싶다고 거듭나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은총이며 선물이라는 것이다. Amazing Grace! 모든 종교를 탄생시킨 사람들은 신비체험을 하는데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거듭남을 체험한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가 그랬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계시를 받는다. 신약성경의 많은 내용을 집필한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를 박해하다가 강제적으로 부활을 체험하고 거듭난다.
나의 노력으로 초월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선택받고 선물로서만 주어진다는 것도 신비롭다. 나는 지금 이성과 신비를 가로 지르는 경계 그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나에게 선물로 이성의 강을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줄지는 모르겠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토템이나 애니미즘, 샤머니즘이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부는 해마다 바다 앞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올 한 해도 무사히 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바다가 고마운 것이다. 해마다 공짜로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니 고마운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제사가 어리석은가? 그렇지 않다. 시베리아의 타이가 숲 속에는 호랑이가 산다. 원주민들은 이 호랑이를 위대한 왕이라 부르며 경배한다. 토템사상이다. 생태계의 최정상에 있으며 순환의 윤활유역할을 하는 호랑이를 모시는 것이다. 자연을 경외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신앙의 또 다른 의미는 겸손이 다. 인간이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나보 다 더 우월한 존재가 있으니 나는 그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신앙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다른 것이 대신한다. 인간 스스로 를 숭배하고 돈을 숭배하고 과학을 숭배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종들이 끊임없이 멸종과 탄생을 거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만약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인공지능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자연선택의 하위 부류에 속하는 인위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태어남과 떠남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기에 사르트르는 인간은 이 세상에 내 던져졌다고 표현했다. 근원적 불안을 안고 내 던져진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끊임 없이 찾아나간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가 나를 창조한 존재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거듭나는 것이다. 반면 ‘신은 죽었다’며 인간의 나약함을 떨치고 스스로 초인이 될 것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냐? 초인이 되어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나? 이런 선택은 인생을 가르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이다. 나는 이성의 영역에서 초월의 강건너 신비의 땅을 바라보며 오늘도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