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향한 탐구_철학적 삶
정답이 없는 질문들
2023년 12월 23일 오전 6시 40
철학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지금은 일을 그만둔 상태이지만 학생들과의 추억을 가끔 돌이켜 본다. 1년 동안 다양한 책을 학습하고 12월쯤 가면 한 해 동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뭐냐고 물어본다. 놀랍게도 철학 분야의 책을 가장 많이 언급한다. 의외의 대답이다. 그런데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철학이야말로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의 학명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면 이내 철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바쁘고 힘든 일상, 경쟁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깊은 사고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는 경지까지 가기가 힘들다. 철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다. 시간, 죽음, 행복, 사랑, 옳음, 용기, 질병 등 인간이 살면서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이 세상에는 수치화할 수 있는 정형 데이터, 수치화할 수 없는 비정형 데이터 두 가지 형태의 정보가 존재한다. 지난 60년간 1세대 인공지능은 수치화할 수 있는 정형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을 압도적으로 키워왔다. 계산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고양이와 개를 구별하는 인간에게는 아주 단순한 문제해결도 어려워했다. 개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능력은 수치화할 수 없는 비정형 데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들은 비정형 데이터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답보상태에 놓여있던 인공지능 알고리즘 발전에 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딥러닝이라는 기술이다.
인간의 학습을 모방한 것이 딥러닝이다.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축적된 정보의 패턴을 파악해 통계적인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부모가 아주 어린 자녀에게 동물원에 가서 저거는 사자, 저거는 호랑이하고 알려주면 아이는 금방 둘을 구분해 낸다. 인공지능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개와 고양이의 사진을 입력하고 개와 고양이임을 알려주면 패턴을 분석해서 구별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와 고성능의 CPU를 장착한 컴퓨터가 필요하다. PC 성능의 향상으로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자 드디어 새로운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다. 구글의 알파고가 그 시작을 알렸다.
차원이 다른 생각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인공지능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한다. 논리로도 통계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를 사유한다. 의사에게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환자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한다. 연봉이 1억이 넘지만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는 어느 직장인은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여행을 떠난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고 이를 실천한다. 인간은 이런 문제들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 이별과 상처와 좌절과 우울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답이 있을까? 누가 옆에서 답을 주더라도 그게 해결이 될까? 아주 단순한 문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기가 결정하고 그에 대한 결과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씩씩하고 용기가 있다면 비록 잘못된 결정을 하더라도그로 인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다시 못 일어서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 한 명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처절한 비극도 있고 가슴 훈훈한 해피엔딩도 있다. 누가 만드는가 바로 본인이다.
그러하니 그 길을 헤쳐갈 수 있는 방법을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하는 철학이라는 분야가 매력적이고 기억에 날 수밖에. 학생들도 자신만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그 즐거움 중에는 배움의 즐거움도 있다 배우는 일은 원래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는 학생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때에 맞지 않는 과다학습 때문이다. 또 인간에게는 사유의 즐거움도 있다. 생각하는 과정에서 깨닫고 지혜를 얻는 즐거움도 상당하다. 아인슈타인은 오로지 상상만으로 상대성 이론을 직관했다.
늘 깨어 있기를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주변환경의 압도적 공세에 넘어가게 된다. 자신의 생각인 것 같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생각하면 돼! 라면서 의도적으로 흘린 생각을 내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다.
왜 뜬금없이 연예인의 마약사건이 쏟아져 나오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대중매체가 아주 발달한 시대의 부작용이다.
혼자 사유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이 나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초등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뭐가 제일 중요하냐고 물어보면 돈이라고 말하는 학생이 제일 많다. 그들 눈에는 뭐든지 살 수 있어 보이는 돈이 제일 중요하다. 특별히 부모의 다른 가르침이 없으면 그대로 성장할 것이다. 중학생은 조금 다르다. 외모도 관심이 생기고 성적도 중요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진다. 그런데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공부, 성적, 경쟁 온통 이런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다른 생각의 길을 열어주지도 않는다. 자극이 없다. 돈과 경쟁과 성공과 실패라는 생활 속에서 학습된 무언의 가치관이 내면을 지배한다.
그 경쟁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간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아름다운 세상을 찬양한다. 경쟁에서 패배한 더 많은 누군가는 헬지옥을 외친다. 왜 다른 세상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야 한다. 고독한 사유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피라미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마이 웨이를 선언하거나 지독한 노력과 성공의 간절함 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수밖에.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인내하고 묵묵히 견디어 내든가.
고독한 사유
고독한 사유가 필요하다. 하루의 특정시간을 고독을 위해 할애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세상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 어떤 이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 진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실이라는 진리와 옮음이라는 진리다. 사실은 정보나 지식의 참과 거짓을 말하며 옮음은 인간행동의 방향이다. 사실은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지만 옳음은 논쟁적이다. 그래서 자기만의 옳음을 만들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주 독특한 학습법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의 도서관은 아주 시끄럽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상대를 찾는다. 상대를 찾으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탈무드나 경전을 펴서 바로 대화를 시작한다. 토론이다. 자신만의 옳음을 만드는 과정이다. 하브루타라고 불리는 이 학습방법은 유대인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불리게 만드는 핵심비결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어린 시절부터 아주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 사유의 과정이 지속되고 익숙해지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 나로부터 시작된 사유는 친구, 가족, 이웃, 사회, 국가, 세계, 우주로 확장된다. 자아의 성장과정이다. 인간의 신체는 20세 초, 중반 성장을 멈춘다. 그러나 내면세계의 성장은 한계가 없다. 매슬로우는 그의 책 <존재의 심리학>에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단계별로 정의했다. 1, 2단계의 기본적 욕구가 잘 충족되면 지속적 성장으로 확장된다. 점점 성숙한 인간이 된다. 철학적 삶이다.
철학자들이란 인생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다. 생각하는 게 직업이다. 주변에서 지켜보면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다. 늘 멍 때리고 있으니까. 악처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아내도 이해가 간다. 남편이 돈은 안 벌고 빈둥거리고 있으니까. 이들은 인류를 대신해서 생각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이를 다룬 소설이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역작 <유리알 유희>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살다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게 될 때 철학자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 찾아보면 벌써 2500년에 답을 내린 문제인 경우도 있다. 그 답이 나의 해결책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철학의 시작이다. 철학자가 평생에 걸쳐 얻는 결론이니 아주 깊은 메시지가 숨어 있다. 온 인류를 대신해 생각하는 사람, 나는 이들을 철학자라고 부른다. 물론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편지
마지막으로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쓴 편지에 대해 잠깐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정조 사후 노론의 대부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고 정조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화를 입는다. 신유박해로 남인들이 숙청당하고 정약용도 귀양을 떠난다. 그는 유배지에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자신의 유배를 다산학의 창조로 승화시킨다. 그런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두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정약용이 가장 먼저 당부한 것은 세상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죄 없는 아버지의 유배로 어린 자식들이 분노나 원망을 마음에 담는 것을 우려했다. 이런 세상에서 공부는 해서 뭐 하냐면서 공부를 게을리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편지의 내용에는 공부에 관한 내용이 많다. 공부의 목적은 자신의 인격을 닦는 것이라는 선비들의 생각도 담겨있다. 공부의 순서에 관한 내용도 있다. 이를테면 시기별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상한 가르침도 있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일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정약용의 당부이다.
크게 두 가지의 기준이 있다. 옳음과 잘못됨, 이익과 손해이다. 두 가지 기준을 가로 세로로 크로스 시키면 네 가지의 상황이 나온다. 첫째, 옳으면서 이익이 되는 일 둘째, 옳지만 손해가 되는 일
셋째, 나쁜 일이지만 이익이 되는 일 넷째, 나쁜 일이면서도 손해가 되는 일이다.
첫째와 넷째는 쉽게 분별할 수 있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네 번째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기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그들 중에는 이나라 최고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도 있다. 바보! 바보 중에 똑똑한 사람이 아주 많다.
문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이다. 옳고 그름의 구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다수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준은 분명히 있다. 법률도 그중의 하나이다. 둘째와 셋째의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은 어릴 때부터 학교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이 되면 이미 경험을 통해 체득한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있기에 잘 안 바뀐다. 이익을 옳음의 기준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아주 많다. 반대로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틀린 거다. 둘째와 셋째는 그 상황에 직면하면 개인의 결단이 필요하다. 용기도 필요하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판단의 두 가지 기준을 말해주며 바른 길을 걸을 것을 당부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참 마음이 아팠다. 왜? 나의 두 자녀에게 저런 가르침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통해 배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쳐주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 앞으로 노력해 볼 생각이다.
힘든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무기가 필요하다. 언제나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무기. 나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고 믿는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자신만의 철학이다.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는 없지만 철학적 삶을 살 수는 있다. 생각을 게을리하지 말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잘 따져보며 살아야 한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빛나는 삶은 고난과 시련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잃지 않는 여러분의 찬란한 인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