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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Feb 04. 2023

계몽 안에 야만이 숨어 있다

고전산책03 <계몽의 변증법> 호르크 하이머, 아도르노

위대한 사상은 시련 속에서 탄생한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낳는다. 인류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올바른 길인가? 인류가 겪은 이 야만적 대재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대재앙의 한 가운데서 야만적 학살을 직접 목도했던 일련의 독일 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계몽의 변증법>은 그 치열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서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플라톤


동굴의 비유



진리를 찾아 끝없이 사유하던 그리스의 고대철학자들이 닿은 종착역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 이데아였다.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아를 통해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감각으로 받아들인 대상의 진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사라지고 변하는 것은 진리일 수 없다. 인간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가짜인 셈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플라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했다. 고심 끝에 그는 진리를 사유의 세계로 넘겼다. 정신 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아야 진리이다. 이데아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서양 철학사에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흐름이 탄생했고 이성중심의 사유체계가 형성되었다. 서구문명의 핵심줄기 중 하나인 기독교는 초기 형성과정에서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이를 두고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데아를 향한 갈망, 에로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완벽한 이상향이었고 인간의 노력과 활동은 모두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의 표현이었다. 이데아를 향한 인간의 염원이 문명을 탄생시키고 인류역사를 지탱해온 셈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향한 인간의 소망과 염원을 에로스라 불렀다. 완벽을 향한,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노력이 서양문명을 이끈 원동력이다. 중세의 시작은 기독교의 시작이었고 중세의 종말은 합리적 이성의 부활이었다. Dark Age라 표현되듯이 신을 향한 믿음과 구원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던 시기를 거쳐 합리적 이성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에 부활한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문명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고대철학자들의 저작과 기록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랍인들에 의해 번역되어 전승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을 밟는다. 플라톤의 연역적 사고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적 사고방식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승화되어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어준다. 합리와 이성의 전통이 복원된 것이다.



과학혁명으로 정점에 다다른 자신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연역적 명제는 근대철학의 시작이었다. 신을 대신한 주체의 자각은 인식주체인 인간과 인식대상인 자연으로 이원화된 사고방식을 낳는다. 주체는 주체 밖의 세상, 즉 타자를 인식하였고 이내 곧 인식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기 시작한다. 만유인력의 발견은 인간이성의 위대한 승리였다. 사람들은 더욱 자신들이 지닌 이성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타자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탄생시킨다. 계몽의 시작이다. 자연세계의 법칙을 알아갈수록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은 높아져 간다. 과학혁명은 인간의 자연지배에 대한 자신감을 한껏 드높인 결정적 계기였다.



이해는 지배의 출발점



“아는 것은 힘이다” 이 말속에 당대를 표현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지배의 영역은 사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타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우월의식은 타자의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시킨다. 신대륙을 개척하고 식민지를 확보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대표적 예이다.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타인을 정복하고 스스로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미 야만은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노예해안에 가서 마음껏 노예사냥을 한 뒤 라틴아메리카의 사탕수수농장에 노예를 팔고 대신 설탕을 받아 유럽에 다시 되팔아 부를 축적했다. 삼각무역은 이성과 야만이 절묘하게 조화된 환상의 치부수단이었다. 우아한 유럽의 사교문화 뒤에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피와 눈물이 숨어 있었다.



계몽에 숨겨진 야만의 싹



‘계몽’은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무지를 벗고 새로운 앎에 도달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는 계몽 안에 이미 야만이 숨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예로 들어 보자. 인간의 학대를 참다 못해 동물들이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킨다. 농장 주인을 몰아낸 뒤 동물들은 서로의 역할을 정한다. 가장 중요한 브레인 역할을 돼지들이 맡는다. 왜냐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기 때문이다. 자원의 분배와 주요정책의 결정권을 돼지들이 갖게 되자 돼지들은 서서히 변해간다.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싶은 욕망을 갖게 만든다. 지배욕이 생긴다는 것이다. 선의로 시작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보면 소록도에 부임한 원장이 원생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간척사업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죽어가면서 사람들은 이내 누구를 위한 간척 사업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결국 원장은 섬주민에 의해 살해된다. 구성원의 동의없는 일방적 선의는 계몽을 가장한 야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성은 왜 전체주의를 탄생시켰는가?



칸트와 헤겔을 탄생시킨 나라,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인 독일국민들은 왜 전체주의에 열광했을까? 왜 서양역사를 이끌고 온 이성이 전체주의로 귀결되었을까? 이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의문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성은 인식의 수단이다. 인식은 필연적으로 인식의 효율성을 위해 개념화 과정을 거친다. 대상을 파악하고 대상의 특징을 바탕으로 개념화작업을 하게 된다. 그 다음이 문제인데 개념화된 인식은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다양한 인식대상을 획일적으로 정의해버리고 이미 만들어 놓은 개념 안에 편입시켜 버린다. 계몽은 이렇게 개념화와 동일성의 논리를 도구적으로 이용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한다. 동일성과 지배를 핵심 요소로 지닌 계몽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히틀러 유겐트



전체주의적 동일성의 지배와 폭력은 나치즘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게르만민족이라는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유태인을 제거함으로서 완전한 동일성을 구축하려 했다는 것이다. 대상의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성에 의해 이미 개념화된 체계 속에 대상을 강제적으로 밀어 넣거나 또는 아예 대상을 제거해버리는 방법을 통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인식체계를 갖추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성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활동을 핵심으로 하는 계몽은 야만의 싹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끝나지 않은 야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결정적 능력은 생각하는 힘이다. 이성은 인류문명을 창조해온 결정적 요인이다. 이러한 이성의 귀결이 전쟁과 전체주의였다는 사실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 이성 안에 이미 폭력과 야만이 내재되어 있다면 전체주의는 여전히 인류에게 도전이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정복대상으로 바라보는 한 이 문제를 풀 방법은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자연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며 화해의 대상이다. 새로운 과학문명의 시대에 이러한 뉴테크놀러지와 결합한 이성이 새로운 종류의 야만을 탄생시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획일화와 동일화에 맞서 다름과 다양성의 강렬한 추구가 필요하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믿는 이성이 지닌 능력의 실현과정에서 폭력과 전체주의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 우리는 이성과 야만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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