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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Feb 22. 2023

디오니소스는 부활되어야 한다

고전산책 04 <비극의 탄생> 니체

 시대정신


개인은 시대가 펼쳐낸 다양한 사상과 문화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거대한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기 쉽다. 개인은 미약하고 둘러 쌓인 환경은 강하고 압도적이다.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운 예술과 문화는 개인의 취향과 예술적 관점을 형성한다. 무수히 많은 개인들은 그렇게 미약한 존재로 시대 속에서 함께 흐름을 만들고 조응하며 따라간다. 하지만 그 속에 새로움은 없다. 새로움은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탁월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시대 안에서 그 시대의 몰락과 소멸을 예감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다. 독일은 문학과 예술에서 유럽을 이끌어왔다. 니체가 말한 ‘독일정신’이 그 핵심에 존재한다. 독일정신의 화려한 전성기가 사그라드는 징조가 보이자 니체는 그 붕괴의 조짐을 먼 옛날 그리스에서 찾는다. 천재의 눈에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니체가 그랬다. 그는 자기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정수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그 실체와 한계와 변화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다시 독일정신을 회복하고자 한다. 자기 시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한계와 몰락을 예언하는 자는 흔치 않다. 전복과 도발적 태도는 니체사상의 진수이다. 시대를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니체의 직관은 빛난다.


 디오니소스 VS 아폴론


아폴론적 태도는 꿈, 이데아를 상징한다. 다다르고 싶고 가야만 하고 이루어야 할 성취, 목표를 의미한다. 디오니소스는 도취이다. 현재적이고 본능적이며 강렬하다. 예술은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시작하고 완성된다. 그것은 즉물적이고 충동적이며 도발적이다. 신화의 탄생이며 신비의 연속이다. 예술의 몰락은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사라지고 합리주의와 이성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은 그 시작이다. 소크라테스의 등장은 그리스 비극의 종말을 예고한다. 왜 비극인가? 왜 그리스 문명의 절정기에 비극이 탄생했는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그 중간 어디쯤 비극이 존재한다.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이 서로 견제하며 붙들고 있는 긴장의 영역에 그리스 비극이 존재한다. 삶은 신비이자 비극이다. 아름답지 않고 낙관적이지도 않다. 비극적 삶을 낙관적 삶으로 대체할 때 그리스 문명의 몰락이 시작된다. 신화의 세계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넘쳐난다. 인간의 삶을 신에게 의존하며 온전히 일치시키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삶을 운명에 맡긴다. 의문은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경건과 복종과 신비의 삶만이 존재한다. 거기에 비극은 없다. 비극은 비극이 아니라 신의 섭리이다. 순종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아폴론적 충동이 개입한다. 나에게 꿈이 있다. 나의 꿈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운명이 개입한다. 나의 꿈은 좌절된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좌절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다. 나의 정신은 살아서 의연하게 운명에 저항한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이다. 니체는 그 당시 독일정신의 부활은 죽어있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다시 부활시킬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독일정신의 부활가능성을 바그너에게서 보았다. 합리적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은 감동이 없다. 단순한 넋두리이며 동어반복이다. 밋밋하고 지극히 평범하며 지루하다. 언제부터 예술이 이렇게 변했는가? 과학과 합리주의 정신, 철학이 예술을 이렇게 만들었다. 예술은 직관적이고 말할 수 없는 충동이고 자아의 도취이다. 신비롭고 성스럽다. 예술의 목적은 이성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의한 예술의 탄생이다. 모든 합리와 논리가 예술을 죽이고 있다. 유럽의 예술은 죽어가고 있다. 다시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살려야 한다. 그것은 삶의 원초적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다.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충동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 작품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독일정신은 그렇게 다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음악의 힘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원초적이다. 가사 없는 음악은 존재할 수 있지만 멜로디 없이 가사만 있는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가사로 규정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는 그 원초적 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초적 힘이 음악에는 있다. 우리 안에 이미 음악이 들어 있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바로  음악이다. 그 힘은 강하고 역동적이다. 가장 원초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그 음악의 힘을 보았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부활하고 있음을 보았다. 원래 비극에서 선보였던 음악은 악단의 합창이다. 무대 옆에 설치된 코러스단의 집단합창을 통해 극의 진행과 구성이 이루어졌다. 대사와 연기가 극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코러스의 압도적 합창에 의해 극의 분위기와 긴장을 만들었다. 관객은 합창을 함께 들으며 그들의 고통에 동참한다. 관객의 내면에 잠재된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함께 발화시키며 공연에 몰입했다. 멜로디의 힘은 크다.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다양한 변주는 이미 그 자체가 멜로디이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좌절은 멜로디가 되어 심장을 움직인다. 함께 듣는 사람은 상대에 맞추어 자신의 심장을 조응시킨다. 함께 거대한 악단이 되어 음악을 창조하고 연주한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발현인 것이다.


 비극이란


삶은 항상 행복하지 않다. 슬프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더 많다. 언젠가 모두 죽는다. 비극은 삶을 제대로 반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는다. 슬픔이 눈앞을 가리고 고통이 심장을 찌른다. 그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 행복한 삶, 아무 문제가 없는 인생, 그것은 과연 정직한가?   비극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비극을 만든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고 찬란한 시대에 비극을 고민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그리스인들이 지닌 정신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페리클레스의 민주주의와 함께 전성기를 맞이한다. 풍요한 부와 정치적 자유를 갖춘 그리스인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보다는 비극을 창조하고 감사하며 인생을 노래했다. 인생의 본질을 직관했다. 비극 앞에 직면한 인간의 정신의 크기를 가늠했다.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정신을 사랑했다. 죽음 앞에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 환호했다.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가? 고통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정신을 닮고자 했다. 그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삶을 사랑하는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드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아폴론적 충동을 한데 엮어 어느 문명도 감히 창조하지 못한 찬란한 비극을 만들어 인류에게 선물했다. 그리스인들의 위대함은 문명도 이성도 과학도 아니다. 오로지 삶을 향한 진지한 태도이다. 인생의 본질을 직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고민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에 사로잡혀 노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리스인의 운명애적 태도를 배우며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2500년 전 그리스인들보다 더 퇴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예술을 끌고 가는 힘


잘 짜인 스토리, 완벽하게 계산된 반전이 현대인들이 접하게 되는 작품들의 보편적인 내러티브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극의 구성은 딱 그 정도만큼의 가벼운 감동과 반응을 이끌어 낸다. 보게 되면 숨을 쉴 수 없는, 온정신을 깨워 전율케 하는 강렬한 예술작품의 창조는 왜 그리 어려운가?  니체는 그 해답을 소멸되어 가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찾는다. 예술의 본질은 잘 만들어진 내러티브에 있지 않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충동, 감정의 연속, 본능을 건드리는 선험적 경험, 이 모든 것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도덕이다. 도덕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도록 만드는 족쇄이다. 도덕 아래 신음하는 자연의 본성은 상처받고 찢어져 회복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교훈은 최악이다. 누가 누굴 가르치는가? 도덕의 굴레를 벗어야 참다운 예술이 창조된다.  두 번째는 이성과 합리주의이다. 인과관계에 얽매인 예술은 생명력을 잃는다. 충동과 본능의 연속, 불합리와 신비의 충동과 모순의 등장, 이런 것들이 예술을 참다운 예술로 만든다. 불화를 사랑하라. 모순을 창조하라. 이성을 제압하라. 그리하여 본능적 충동과 불합리와 모순이 넘쳐나는 괴물을 만들라. 내면 깊숙이 웅크린 채 오랜 시간 대접받지 못하고 잠자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현신을 끄집어내 주인공이 되게 하라. 할 말 많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고 완성하리라.


그대 디오니소스여!  어서 일어나라!  너의 현신을 보여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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