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21
진리에 대한 판단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과 판단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자신이 직면한 특정한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때가 있다. 흔히 말하는 갈등의 시작이다. 세상에 대해, 사물에 대해 이견이 없는 획일적 견해는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주관적이고 당파적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견해도 또한 그러하다. 옮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대략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우리의 감각이 사실로 인정하는 것. 색깔 모양 등. 감각으로 인식한 정보가 사실과 부합하는 경우 별도의 해석 없이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감각의 정밀도가 한계가 있고 개인의 능력차가 있기 때문에 미묘한 갈등의 요소가 존재한다.
둘째, 논리적 정합성이다.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다. “두 시간짜리 계엄이 어디 있느냐”는 대통령의 주장이 궤변임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충 알 수 있다. 두 시간짜리 계엄을 위해 1년 이상 준비하고 국가의 모든 무력수단을 동원한단 말인가?
셋째, 다수의 주장을 옳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그러나 다수의 견해가 옳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취약성이 바로 이점에 있다. 이때 다수는 반드시 스스로 사유할 줄 아는 합리적 개체라는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 미디어의 영향력에 노출되어 판단력을 잃을 경우 대세를 따르는 경우도 많다. 다수의 선택은 옮음을 판단하는 여러 기준 중 참고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넷째, 자신의 이익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면 옳은 것이고 자신에게 해가 되면 틀린 것이다. 네 번째 기준은 두 번째 기준과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결국 힘이 센 자가 선악을 판단하는 야만적 사회가 될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가려는 경계에 서 있다고 판단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상에서 언급한 네 가지 중 반드시 하나의 기준만이 옳고 그름을 뒷받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에 한해서 불합리와 모순의 혼돈을 거쳐 합리와 옳음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화적 유전자 밈의 축적이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등이 합리와 옳음이라는 대 전제하에 구축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진화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그러나 제도의 합리성과는 별개로 인간 자체의 진화는 그리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진화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인간의 진화는 적응이다. 진화가운데 우연히 등장한 대뇌피질 전두엽의 활약으로 합리적인 제도를 구축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가끔 합리적인 문명 하에서 미친 자들이 나와 지금까지 쌓아놓은 합리성을 허무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는 수십만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아주 긴 여정이다. 인간은 아직 원시시대의 형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인간 문명의 역사는 기껏해야 10,000년 정도이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 로고스의 시대는 불과 2,500 년에 불과하다. 원시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 위에 문명의 세례를 겹겹이 구축해 놓았다. 생존을 위해 다른 포식자와 경쟁하며 살아가던 인간의 원초적 본성 위에 문명과 교양이라는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언제든지 야만과 불합리, 본능의 본성이 내면에서 터져 나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야만은 우리 안에 있다
이미 인류는 20세기 초에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을 경험했다. 이성이 야만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전체주의의 등장은 인간 이성의 취약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했다. 야만이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되어 있다.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미래사회에 등장할 전체주의와 야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인간은 완성형 존재가 아니다. 불완전한 존재이며 대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하나로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스스로 성찰하고 돌아보는 인간 고유의 사유능력을 애써 기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인간 형질의 하나인 본능과 야만이 이성을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전쟁은 이유를 불문하고 야만의 대표적 사례이다. 제노사이드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대량학살을 경험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앞으로 전쟁이 사라질까? 천만의 말씀. 민주주의는 탄탄대로를 거쳐 안정된 시스템으로 정착할까? 야만과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형질이 진화를 거쳐 새로운 적응을 이룰 때까지 인류가 겪는 시행착오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법과 제도를 통해 최대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절대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슬픈 선물
무속과 폭력, 야만 그에 맞서는 이성과 합리, 정의가 다시 한번 불꽃 튀기며 정면으로 맞붙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다. 그 가운데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을 이 나라 최고 엘리트들의 모습을 통해 목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짐승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야만과 폭력을 옹호하는 짐승같은 자들을 보며 심지어 그들이 국민의 택함을 받은 자들임을 생각하니 아 우리의 어리석음이여!
인간의 지혜는 아무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실패 좌절을 통해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5.18의 광주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시 다가왔다. 그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역사적 실존으로서 개인은 그렇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역사의 강물에 휘말리며 치열하게 앞날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삶이고 운명이다.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하고 바랄 수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 짐승처럼 살뿐이다. 진리의 빛이 우리를 구원하기를....... <정의>의 아름다움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